국내 방위산업은 1970년대 국방과학연구소(ADD) 설립을 기점으로 정부의 국방중기계획 아래 지속 성장해왔다. 2000년대 K9자주포와 T-50훈련기 수출로 글로벌 시장에 본격 진입한 뒤, 높은 품질과 빠른 납기를 앞세워 유럽·중동·아시아 등으로 외연을 확장, 그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편집자주
[서울파이낸스 문영재 기자] 광복 이후 치러진 6·25 전쟁은 국군에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당시 국군은 북한이 운용한 소련제 전차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참전 장병들은 회고록에 "우리에게도 전차가 있었다면···"이라는 통절한 한탄이 기록돼 있다.
이러한 경험은 기갑 전력 강화가 국가 안보의 필수 과제임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전후 정부는 전차 개발에 전폭적인 투자를 단행했고, 현대로템은 이를 기반으로 1985년 K1전차, 1992년 구난·교량전차, 1997년 K1A1전차를 연이어 선보이며 독자 기술 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2007년에는 K2전차 시제품을 공개했으며, 2010년 본격 양산에 돌입하면서 세계적 수준의 기갑 체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전차는 전쟁의 본질인 영토 점령을 좌우하는 핵심 전력이다. 1916년 영국이 마크1을 실전 투입한 이후, 전차는 한 세기를 관통하며 전장의 기마병 역할을 수행해왔다. 현대에 들어서는 120밀리미터(mm)급 주포와 시속 60킬로미터(km) 안팎의 기동 성능이 평준화되면서, 자동장전장치와 지휘·통제·정보·감시·정찰(C4ISR), 능동방호체계 등이 차별화 관건으로 떠올랐다.
특히 드론 위협이 부상한 현대 전장에서는 능동방호체계가 성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로 자리 잡았다. 이 지점에서 K2전차의 균형 잡힌 성능과 확장 가능성이 앞세워 전략적 가치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K2전차는 1500마력의 디젤 엔진을 탑재해 톤(t)당 출력 27.3마력, 시속 70km, 항속거리 450km를 구현한다. 도하 능력도 4.1미터(m)에 달해 지형 제약을 덜 받는다. 주포는 120mm 55구경장 활강포이며, 자동장전장치로 40발을 운용할 수 있다.
생존성은 복합·반응장갑으로 확보했으며, 소프트·하드킬 능동방호체계를 더해 방어 능력을 끌어올렸다. 여기에 포수와 전차장이 동시에 표적을 탐지·제압할 수 있는 헌터킬러 기능까지 갖추며 기동·화력·방호 간 균형을 이뤘다.
변용진 iM증권 연구원은 "이러한 성능 덕분에 K2전차는 국내는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며 "생산성 측면에서도 강점을 갖춰 평시 연간 100대 이상 양산을 할 수 있고, 수요 확대 시 증산도 가능해 유럽과 중동 시장에서 빠른 대응이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 현대로템은 2022년 폴란드에 K2전차를 최초 공급하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시장에 본격 진입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발생한 전차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PT-91·T-72M1/M1R 퇴역을 전제로 K2전차와 미국의 에이브럼스를 병행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나아가 지상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국을 유럽 내 K2전차 전진 병참 기지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기조 속에서 현대로템은 지난달 초 폴란드 군비청과 약 65억달러 규모의 2차 이행계약을 체결했다. 이번 계약은 K2GF 116대, 폴란드형K2전차(K2PL) 최초 양산분 64대, 구난·개척·교량전차 등 K2 계열 장비 81대 등을 아우르는 종합 패키지 형태를 띤다.
특히 이번 계약은 단순한 물량 확대를 넘어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폴란드 내 현지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될 보급·정비 인프라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생산은 폴란드 국영 방산그룹(PGZ) 산하 전차 전문업체 부마르가 맡으며, 본격 양산 시점은 2028년으로 예정돼 있다.
현대로템은 K2PL에 대전차 유도 미사일과 드론 위협을 무력화할 수 있는 하드킬 능동방호장치, 전파 교란을 통한 드론 재머 등을 추가해 방어력을 한층 강화할 방침이다. 또한 K2PL을 비롯한 계열 장비에서 검증된 기술을 국군 전력에 단계적으로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단순히 해외에 판매하는 수출형 플랫폼을 넘어, 글로벌 공동개발 체계로 확장하면서 기술 내재화와 운용 경험을 국내 전력에 적용하겠다는 구상이다.
폴란드 현지 생산 거점이 자리 잡게 되면 현대로템의 유럽 시장 확장 속도는 한층 빨라질 전망이다. 양승윤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유럽은 러-우 전쟁 여파로 무기 재고가 사실상 '텅텅' 비었다"며 "특히 포병과 전차 체계가 가장 부족한데, 이는 한국이 강점을 가진 분야"라고 분석했다.
현재 유럽에서 신형 전차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공급처는 독일의 레오파드과 K2전차가 유이하다. 여기서 납기·부품·가격이 승패를 가르는데, 현대로템은 폴란드와 계약을 맺은 지 불과 5개월만에 초도 10대를 인도했고, 이후 전체 180대 중 110대를 넘겨 잔여 물량 역시 연내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는 유럽 평균 조달 기간이 4.5년에 달하는 것과 대비되는 성과다.
K2전차의 다음 행선지는 중동이다. 현대로템은 우수한 품질과 빠른 납기를 무기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사우디는 비전 2030 전략에 따라 국방 장비 국산화율을 현행 2%에서 5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에 따라 2031년까지 약 260대의 신규 전차 확보가 예상된다. 폴란드 사례처럼 현지 생산과 기술 이전을 결합한 패키지 제안이 유효할 것으로 관측된다.
UAE 역시 첨단 대전차 유도무기의 확산으로 전차 전력 현대화가 절실해지고 있다. 이 같은 수요 속에서 국군은 지난 2월 알하므라 훈련장에서 UAE군과 연합훈련을 실시하며 K2전차 성능을 직접 선보였다. 전장의 실전성을 입증한 이 훈련은 현대로템의 중동 수출 교두보 마련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다.
현대로템 관계자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K2전차뿐 아니라 차륜형 장갑차 체계 발전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며 "무인전투차량(UGV), 유무인 복합체계, 다족보행 로봇 등 미래 무기체계 개발도 병행 중"이라고 밝혔다.
이용배 현대로템 사장도 지난 6월 25일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은 자리에서 "K2전차와 차륜형 장갑차 등 최고 품질을 갖춘 방산 제품을 납품해 대한민국 국방력을 강화하고, 글로벌 방산 4대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UGV를 필두로 한 무인체계 제품 기술 역량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