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광장에 지난 8월13일 기둥 80개로 이뤄진 국가기록 특별전 '빛으로 이어진 80년의 기록' 전시장이 설치됐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지난 8월13일 기둥 80개로 이뤄진 국가기록 특별전 '빛으로 이어진 80년의 기록' 전시장이 설치됐다. (사진=연합뉴스)

[서울파이낸스 서종열 기자] '광복 80주년'을 맞는 올해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어받아 'K-Wave(한류)'를 세계 구석구석에 전파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수탈과 한국전쟁의 폐허 속 최빈국에서, 한 세기도 안 돼 선진국 반열에 오르며 △반도체 △배터리 △조선 △방위산업 등 최첨단 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세상은 이를 '기적'이라고 부르지만, 이 이면엔  한국 사회와 국민 개개인의 특별한 피와 눈물 그리고 저력이 응축된 결과다.

서울파이낸스는 창간 23주년을 맞아 광복 이후 80년간의 역사를 관통하며 대한민국의 성공을 이끈 핵심 동력, 즉 정부의 전략적 선택과 대기업의 과감한 도전을 심층분석했다. 

◇ 절망의 백지에서 시작된 설계 = 1945년 해방 직후 대한민국은 희망보다 절망에 가까운 현실에 직면했다. 일제의 조직적인 수탈로 경제적 기반이 극도로 피폐해졌고, 1950년 한국전쟁은 그나마 남아있던 산업 시설마저 파괴하며 국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이 시기 한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원조경제' 형태를 띠었고, 외국에서 들여온 원료를 가공하는 '삼백산업'(밀가루, 설탕, 면직물)이 유일한 산업군이었다.   

1950년대 6.25 직전의 서울 전경을 담은 사진의 일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1950년대 6.25 직전의 서울 전경을 담은 사진의 일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폐허의 '백지' 상태는 강력한 기득권과 산업 질서가 부재한 탓에, 정부가 주도하는 급진적인 경제개발을 수용하는 기반이 됐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립경제 달성을 목표로 전력, 석탄 등 기간산업을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이어지며,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소와 같은 대규모 인프라 건설을 통해 한국 경제의 근간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과 '선택과 집중' 전략은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대기업은 수출의 전진 기지 역할을 수행하며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는 문어발식 확장으로 중소기업의 성장을 저해하고, 부품 및 소재 산업의 발전을 소외시키는 구조적 취약점을 낳았다. 그리고 이런 취약성은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뼈아픈 시련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체질을 바꾸는 기회가 됐다. 정부는 금융권 유동성 통제와 함께 기업의 투명성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IMF의 교훈을 바탕으로 선제적인 통화·재정 정책을 펼쳐 위기를 극복해냈다. 

한국 경제는 단순히 성장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위기를 통해 자정하고 더 강해지는 독특한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갖추게 된 것이다.   

◇ 세계를 제패한 '초격차' 기술의 방정식 = 오늘날 대한민국은 과거의 제조업 대국을 넘어, 특정 산업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과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그 성공의 방정식은 단순히 기술 개발을 넘어선, 시장과 소비자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삼성전자의 평택 고덕캠퍼스 전경.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의 평택 고덕캠퍼스 전경. (사진=삼성전자)

대표적인 산업군이 바로 '반도체'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의 산물이다. 1980년대 초, 삼성, 현대 등 대기업들은 전자산업의 불황을 돌파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며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3년 내 실패할 것"이라는 냉소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육성 계획과 기업의 과감한 투자는 단기간에 기술 역량을 내재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삼성전자는 초미세 공정 기술과 저전력 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초격차' 전략을 통해 2017년 인텔을 제치고 메모리 시장 1위에 올랐다. SK하이닉스의 사례는 더욱 드라마틱하다. 2000년대 초 IT 버블과 채권단 공동관리라는 위기 속에서도 기술 개발의 끈을 놓지 않는 '위기극복 DNA'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현재 SK하이닉스는 AI 시대의 핵심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엔비디아에 독점 납품하며 선두를 달리고 있다 .   

반도체보다 한발 앞서 세계 1위로 올라선 분야는 단연 '가전산업'이다. 과거 내수 시장에 머물렀던 한국 가전은 이제 혁신적 디자인과 사용자 중심 기술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한다. 삼성전자는 '비스포크'라는 개인 맞춤형 가전을 통해 제품에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고, 가전제품을 인테리어의 일부로 격상시켰다. LG전자 역시 'B2B·고효율·AI 홈'을 3대 축으로 삼아 초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조선업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이봐, 해 봤어?"로 압축되는 불굴의 기업가 정신을 통해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1970년대 정부의 지원 속에서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중공업 등이 설립되며 국제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소총 한 자루도 만들 수 없었던" 과거에서 자주국방을 위한 노력이 결국 독자적인 기술력과 생산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는 오늘날의 조선업은 물론 방위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근간이 되었다.   

실제 K-방산 수출액은 2021년 약 73억달러에서 2022년 173억달러로 급증하며 세계적인 강국으로 부상했다. 이는 뛰어난 성능, 합리적 가격, 그리고 '신속한 납기'가 결합된 독보적인 경쟁력 때문이다. 육상에서 선박을 건조해 바다로 내보내는 현대중공업의 '육상 건조' 공법 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내는 한국 기업의 집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HD현대중공업의 울산조선소 전경. (사진=HD현대중공업)
HD현대중공업의 울산조선소 전경. (사진=HD현대중공업)

K-뷰티와 K-푸드는 K-팝, 드라마 등 '한류'의 영향력 확대와 함께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로드숍에 의존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온라인 채널과 SNS를 통해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다. 특히 CJ제일제당의 '비비고'는 '한식 문화 플랫폼'을 표방하며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했다. 다만 'K-컬처'의 유행에 의존하는 만큼, 일시적 유행을 넘어 식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도록 하는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   

◇ 보이지 않는 저력, 한국인의 정신 =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은 단순히 정책과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독특한 비물질적 자산이 존재한다.

1998년 IMF외환위기 당시 부족한 외화자산 확보를 위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추진, 진행했던 '금모으기운동'. 당시 350만명의 국민들이 참여해 21억달러규모의 외환부채를 갚았다. (사진=K-TV 동영상 갈무리)
1998년 IMF외환위기 당시 부족한 외화자산 확보를 위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추진, 진행했던 '금모으기운동'. 당시 350만명의 국민들이 참여해 21억달러규모의 외환부채를 갚았다. (사진=K-TV 동영상 갈무리)

첫째, '하면 된다'는 불굴의 정신이다. 이는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함과 도전 정신이 결합된 결과다. 정주영 회장이 울산 모래톱에 조선소를 짓고, 중동 진출 사업을 성공시킨 사례는 이러한 기업가 정신의 대표적인 발현이다. 이 정신은 위기나 실패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비물질적 자본으로 작용했다.   

둘째, '높은 교육열'이다. 한국은 부존자원이 부족했지만, 교육을 통해 양성된 풍부한 고급 인력을 보유했다. 이는 전통적인 입신양명주의와 결합돼, 교육이 사회 계층 상승의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분석에 따르면, 1960년대 초등교육에 대한 '선행 투자'는 연간 성장률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는 중등교육에 대한 투자가 성장의 엔진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셋째, '새마을 정신'이다. 1970년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도농 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의 가치를 고취하며 사회적 응집력을 강화했다. 이 운동을 통해 형성된 '협동 정신'은 경제개발을 위한 사회적 동원 체제로서 작동하며 집단적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 새로운 도전 앞에 선 대한민국 =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강력한 정부 주도와 규모의 경제에 있었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경쟁 환경은 소프트웨어, 플랫폼, 알고리즘 역량을 핵심으로 요구한다. 한국 경제는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구조를 통해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

하지만 폐허 속에서 '불가능은 없다'는 정신으로 일어선 대한민국의 저력은 여전히 살아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개인의 노력이 사회 전체의 발전을 이끌어낸 경험 그 자체가 바로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이 저력은 앞으로도 대한민국이 더 큰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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