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서종열 기자] 미국이 추진해온 '상호관세 15%' 기조가 현실화됐다. 일본과 유럽연합(EU)에 이어 한국도 관세협상에서 이를 수용하면서, 글로벌 무역 질서가 기존의 자유무역 체제에서 블록화·보호주의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미국 행정부는 지난 7월22일 일본과의 관세협상을 시작으로, 27일 EU, 31일 한국과 각각 협정을 마무리 지었다. 핵심 동맹국들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상호관세 15%'라는 새로운 국제 통상 기준선이 등장한 셈이다.
이번 일련의 협정은 보호무역주의 확산 우려 속에서도 자유무역의 기본 틀을 유지하려는 '타협적 해법'으로도 해석된다.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와 대응 전략에는 분명한 온도차가 존재하며, 국제사회의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 '15% 상호관세' 공식화···주요국 협정 핵심 내용은 = 트럼프 행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무역 불균형 해소와 '공정무역'을 내세우며, 동맹국들에 일관되게 상호주의 관세 체계를 요구해왔다. 지난 7월 연쇄적 합의를 통해 그 기준선이 '15%'로 가시화됐고, 이는 사실상 글로벌 통상 질서의 새로운 하한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과의 협정에서는 자동차를 포함한 대부분 품목에 15%의 관세가 적용된다. 하지만 국내 쌀과 쇠고기 시장에 대한 추가 개방은 막아냈다는 점은 성과로 평가된다. 한국 정부는 이에 더해 총 3500억달러(약 487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으며, 이 중 1500억달러는 조선업 전용 펀드로 활용될 예정이다.
일본은 5500억달러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며 미국의 요구를 수용했다. 자동차 관세는 기존 2.5%에 상호관세 15%를 적용하되, 일부 감면 조항이 추가되면서 인하 효과도 동시에 기대된다. 다만 쌀을 포함한 일부 농산물 시장 개방을 명시하면서 일본내 정치권과 농민단체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 투자 수익의 90%를 미국이 취득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 발언 역시 논란이 되고 있다.
EU와의 협상에서는 철강·알루미늄 관세 면제와 함께 수출 물량에 대한 쿼터제를 도입하는 절충안이 도출됐다. EU는 약 58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방침을 발표했으며, 주요 투자처는 반도체, 인공지능(AI), 친환경 에너지 등 미래 산업 분야로 집중됐다.
◇ 엇갈린 외신 반응 "트럼프 승리" vs "실용적 타협" = 이번 협정들에 대한 외신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을 압박해 실질적 경제 양보를 이끌어낸 점에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의 결정적 승리"라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한 무역협상 전략이 동맹국들에 유효하게 작동했다"며 이번 합의들이 그의 재선 캠페인 전략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일본 기업들이 자동차 관세 인하를 확보했지만, 투자 수익을 미국이 90% 가져간다는 발언은 정치적 과장"이라며, 실제 이익은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가 철강 관세를 면했지만,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여전히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EU의 대미 투자가 미국 기술산업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번 일련의 합의는 WTO 중심 다자주의의 약화를 상징한다"며 "양자 협상이 글로벌 통상정책의 기본틀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무역의 파편화와 지역 블록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는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압박에 굴복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주요 경제권 간의 상호 관세 조율이 글로벌 공급망의 효율성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다소 낙관적인 반응을 보였다.
◇ "정부 역할, 어느 때보다 중요" = '15% 관세 시대'는 한국 경제에 기회이자 도전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자동차, 전자, 철강 등 주요 수출 산업은 미국 시장에서 예측 가능한 관세 체계를 확보하며 불확실성을 다소 해소하게 됐지만, 동시에 대규모 투자 약속 이행과 산업 구조조정이라는 부담을 안게 됐다.
특히 철강 품목은 미국 내 쿼터나 추가 관세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되지 않아 가격 경쟁력 약화가 우려되며, 일부 산업은 미국산 제품과의 직접 경쟁에 직면할 가능성도 있다.
통상 전문가들은 이를 근거로 "정부가 대미 투자 지원뿐 아니라, 국내 산업 보호·육성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과의 협력 확대는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기술력 확보와 산업 자립도 강화 없이는 중장기적 피해가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번 협정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주체로 올라설 수 있을지, 아니면 대미 종속의 위험 속에서 산업 경쟁력을 잃게 될지는 향후 정부의 후속 조치와 기업들의 대응 전략에 달려 있다"면서 "정부의 역량과 역활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