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여용준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공격적인 투자 행보를 보이면서 과거 故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19일 이병철 창업회장의 38주기 추도식이 열린 가운데 이병철 회장의 과거 행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재계에 따르면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38주기 추도식이 19일 오전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인근 선영에서 열렸다. 이날 추도식에는 삼성을 비롯해 신세계, CJ, 한솔 등 범삼성가 관계자들이 시간대를 나눠 선영을 찾았다.
이재용 회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UAE) 순방길에 동행한 가운데 아부다비에서 열리는 '한·UAE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BRT)'과 일정이 겹쳐 추도식에는 불참했다. 이재용 회장은 귀국 후 별도로 선영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재용 회장은 대통령실 주재로 열린 민관 합동회의에 참석해 2030년까지 450조원을 국내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삼성의 이번 투자 계획 중 핵심은 평택사업장 5공장을 2028년부터 가동하겠다는데 있다. 삼성전자는 "평택사업장 2단지에 새롭게 조성되는 5공장은 2028년부터 본격 가동될 예정"이라며 "안정적인 생산 인프라 확보를 위해 각종 기반 시설 투자도 병행한다"고 전했다. 이어 "글로벌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메모리 반도체 중장기 수요가 확대될 것으로 보고, 시장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생산라인을 선제적으로 확보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평택 5공장은 2023년 착공했지만, 반도체 업황 악화로 지난해 초 공사가 잠정 중단된 바 있다. 당시 5공장 부지는 터파기 정도만 진행된 상태였다. 지난해 말부터 반도체 실적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평택 5공장의 공사 재개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그동안 삼성전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깐부 회동' 이후 GPU 5만장을 확보해 반도체 AI 팩토리 구축의 발판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HBM 수요도 늘어난 만큼 생산라인 확대가 필요해졌다. 특히 삼성전자는 최근에서야 엔비디아 HBM3E 공급망에 합류하면서 HBM 수요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평택 5공장을 HBM 공급 기지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제조 기술력과 연구개발 역량을 5공장에 집중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평택 5공장의 공사비는 총 60조원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처럼 평택 5공장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는 과거 1983년 이병철 창업회장의 '도쿄 선언'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중 첨단 기술인 초고밀도집적회로(VLSI)에 대규모 투자를 선언했다. 당시 미국과 일본 등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후발주자로 뛰어들면서 경쟁력 확보를 위한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한 것이다.
당시 삼성전자의 임원들은 반도체 투자는 위험이 너무 크다며 이병철 회장을 만류했다. 이병철 회장은 인터뷰에서 "잘못하면 삼성그룹 절반 이상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삼성이 아니면 이 모험을 하기 어렵다고 봤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의 결정으로 삼성전자는 용인 기흥에 반도체 3공장을 건설하고 1메가 D램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3공장 기공식이 열린 후 3개월 뒤인 1987년 11월 19일에 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반도체 투자의 성과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듬해 삼성전자는 반도체에서 32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HBM은 2013년 SK하이닉스가 개발해 현재 세계 점유율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세계 AI 칩 점유율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엔비디아의 공급망에 합류하지 못해 경쟁력 확보에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HBM3E부터 후발주자로 엔비디아의 공급망에 합류하고 내년 하반기 상용화를 앞둔 HBM4부터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는 단일 반도체 생산기지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 5공장의 첨단 인프라가 더해질 경우 삼성전자는 HBM4 이후 경쟁력을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평택 5공장 공사 재개에 대해 "삼성전자가 AI 반도체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전자의 이 같은 투자는 HBM 후발주자에서 1위로 도약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1988년 32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후 5년만에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로 올라선 이병철 회장 시절 삼성전자의 모습과 일치한다.
한편 SK하이닉스 역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통해 대규모 공급 기지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2027년부터 단계적인 가동을 시작해 2050년까지 계획된 장기 프로젝트다. 당초 120조원으로 투자 규모가 책정됐지만, 물가 상승 속도와 설비 기술 발전 방향 등을 고려하면 최대 투자 규모가 6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해 "시장수요에 따라 팹 건설속도는 조절해야겠으나 팹 총 4기가 들어설 예정"이라며 "팹 1기당 청주캠퍼스 M15X 6기와 맞먹는 규모"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장비 반입이 시작된 청주 M15X는 20조원 이상 투입된 M15의 확장 팹으로 HBM3E 코어 다이로 쓰이는 1b D램을 생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