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여용준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AI 산업 분야에서 금산분리 규제의 일부 조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이후 정부 부처와 재계가 급격히 술렁이고 있다. 그러나 논의의 중심에 선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금산분리 완화는 최후의 수단"이라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첨단산업 육성이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규제 원칙'과 '투자 활성화'라는 두 축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양새다.
◇ "금산분리 완화, 마지막에 고민할 문제" = 주병기 위원장은 21일 정부세종청사 간담회에서 "첨단 전략 산업에 대한 투자 필요성은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이라고 하면서도, 금산분리 완화 주장에 대해서는 "다른 대안이 있는지 먼저 검토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사실상 금산분리 완화로 기울던 분위기에 브레이크를 건 셈이다.
금산분리 규정은 산업자본이 금융산업을 지배해 부실이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한국 경제의 핵심 규율이다. 대기업 일반지주사가 금융·보험사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한 공정거래법 규정은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조항이다. 공정위가 제도 관리 주체인 만큼 주 위원장이 원칙론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주력 제조업 시설투자 △벤처캐피탈 투자 △소부장 경쟁력 제고 △데이터 인프라 구축 등 4대 전략 분야를 거론하며 "어느 분야가 자본시장 접근에서 가장 제약을 받는지 면밀히 검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AI 투자 확대'라는 명분만으로 제도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다.
특히 주 위원장은 간담회에서 재계의 금산분리 완화 요구가 과도하게 부각되는 분위기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그는 "이 논의가 너무 민원성으로 흐르고 있다"며 "분명한 이유 없이 특정 기업의 요구에 따라 수십 년 누적된 규제를 바꿀 수는 없다"고 직격했다.
이어 "한국 기업들이 연구개발과 혁신 투자를 게을리한 채 규제 탓만 하는 구조가 문제"라며 "금산분리 완화 없이도 주요 전략산업 기업은 스스로 투자를 확대해 성장을 이뤄왔다"고 덧붙였다.
◇ SK 특혜설에 정책 불신 우려도 = 이번 논의가 급부상한 배경에는 오픈AI의 고성능 칩 수요 확대에 따른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대규모 설비 투자 압력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여당이 발의한 공정거래법 개정안 내용 중 '지주회사 체제의 손자회사에게만 첨단산업 투자용 SPC 설립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돼서 논란이 증폭됐다. 해당 개정안에 딱 들어맞는 기업이 바로 SK그룹이기 때문이다.
실제 해당 개정안이 발의된 후 논란은 커지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AI 산업 육성이라는 외피를 썼지만 실상은 특정 재벌 맞춤형 규제 완화"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정책 대상이 '산업 전체'가 아니라 '특정 그룹'에 지나친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취지다. 무엇보다 정부의 산업정책의 금기로 여기고 있는 '금산분리'라는 국가 규범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됐다.
논란이 커지자 최태원 SK 회장은 "SK가 금산분리 완화를 요구한 적은 없다"며 "국가적 차원의 새로운 투자 제도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법 개정안의 구조적 혜택이 SK에 집중된다는 인식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 부처 간 미묘한 온도차···공정위 vs 기재부·산업부, 힘겨루기(?) = 이재명 대통령의 "금산분리 완화 필요" 발언 이후 정부 부처간의 미묘한 온도차가 감지된다.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첨단산업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일부 규제 조정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반면 공정위는 경제력 집중과 사금고화 우려를 중시하며 신중론을 유지한다. 주병기 위원장이 "각 부처가 독립적으로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건설적 해법이 나온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이견 구도 속에서 나온 말로 풀이된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금산분리 규정은 우리 경제를 지탱해온 구조적 취약점이면서 동시에 산업발전을 지탱해온 원동력"이라며 "금융·산업 등 모든 경제 전체의 구조를 놓고 신중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