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이세인 기자] 증권사 환매조건부채권(RP) 잔액이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고금리 장기화 속에 단기 안전자산을 찾는 개인 자금이 급증한 데다, 최근 증시 활황으로 대기성 자금이 불어나면서 수요가 집중된 영향으로 풀이된다.
RP는 증권사가 일정 기간 뒤 다시 사들이기로 약속하고 판매하는 단기채권으로, 사실상 '파킹형' 상품이다. 하루 단위로 환매가 가능하고, 안정성이 높다는 장점 때문에 예·적금 대체투자처로 각광받고 있다.
22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증권사의 대고객 RP 매도 잔액은 이달 18일 기준 101조3262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달 22일 처음으로 100조원을 넘은 뒤 소폭 줄어들었지만 이달 들어 다시 늘어나는 모습이다.
지난달 말(99조9597억원)과 비교하면 1.37%, 연초(76조5891억원)보다는 무려 32.30% 증가했다. 대고객 RP 매도 잔고는 금융회사가 아닌 개인과 법인 고객에게 판매된 RP 총액을 의미한다.
RP 잔액은 최근 증시 활황을 타고 급증했다. 투자자들은 단기 유동성을 확보한 뒤 주식시장 상황에 따라 즉각 매수에 나설 수 있는 파킹형 상품으로 RP를 활용하고 있다. 머니마켓펀드(MMF)나 종합자산관리계좌(CMA)와 비교해 환매가 자유롭고 거래가 간편하다는 점에서 증시 활황기에 특히 선호도가 높다는 분석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RP는 고금리 환경에서 매력적인 투자처이지만, 최근 증시 활황으로 대기자금 성격이 더 강해졌다"며 "주식시장에 기회가 열리면 RP에서 빠져나간 자금이 곧장 증시로 유입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개인뿐 아니라 단기 운용처를 찾는 중견기업들의 수요가 늘면서 법인 대상 RP 잔액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단순히 개인의 파킹 자금만이 아니라 기업 자금 관리 수단으로서 RP 활용도가 높아졌다는 해석이다.
증권사에겐 RP가 중요한 유동성 조달 수단이다. RP 발행으로 모은 자금은 채권 매매·운용에 활용돼 수익 안정성을 높이고, 기업대출이나 인수금융 같은 투자은행(IB) 영업에도 마중물 역할을 한다. 대형사는 자금 여력을 확대할 수 있고, 자기자본이 크지 않은 중소형사는 RP를 통해 단기 자금을 조달하며 리스크 관리에 나설 수 있다.
다만 위험 요인도 적지 않다. RP는 예금자보호법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 증권사의 신용 위험이 곧 투자자 위험으로 직결된다. 또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를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이 금리 인하 사이클에 진입할 경우 RP 금리 매력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단기 자금이 빠르게 이탈하며 증권사 유동성 관리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투자업계 다른 관계자는 "RP는 단기 자금 성격이 강해 언제든 대규모 유출이 발생할 수 있다"며 "금리 국면이 바뀌면 증권사들은 곧바로 유동성 압박을 받을 수 있어, 선제적인 운용 전략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