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여용준 기자] 삼성전자가 30년 넘게 지켜온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1위 자리를 올해 1분기부터 SK하이닉스에 내줬다. 1974년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이후 1993년부터 줄곧 정상 자리를 지켜온 삼성전자로선 뼈아픈 상황이다. 다만 한국 기업이 여전히 세계 메모리 시장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 64M D램서 시작된 삼성의 질주, ‘IDM 1위’로 완성 = 삼성전자가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1위에 오른 계기는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하면서부터다. 당시 세계 1위였던 도시바를 제친 삼성전자는 D램 기술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제품군에 투자를 확대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D램, 낸드플래시, 모바일 AP 등으로 제품군을 넓혔다. 이 시기 삼성전자는 처음으로 국내 기업 시가총액 1위에 올랐고, 2017년에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타고 성장해 인텔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매출 1위 기업에 등극했다.
비메모리 반도체도 성장세를 보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19년 발표한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기반으로 시작한 이미지센서는 업계 1위인 소니를 위협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다. 파운드리 사업은 대만 TSMC에 밀려 고전했지만, 최근 테슬라·애플 등을 고객사로 확보하며 반등을 모색 중이다.
이처럼 삼성전자는 메모리 중심에서 시스템 반도체까지 영역을 넓히며 세계 최대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AI 반도체 수요 폭증과 함께 성장한 고대역폭메모리(HBM)에 적기에 대응하지 못하며 주도권을 SK하이닉스에 내줬다.
◇ AI 열풍에 올라탄 SK하이닉스, HBM으로 2인자 굴레 벗다 = SK그룹이 2012년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며 탄생한 SK하이닉스는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슈퍼사이클에 대응하며 2017년 10조원대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며 SK그룹의 '효자 계열사'로 떠올랐지만, 메모리 시장의 절대 강자인 삼성전자에 밀려 2인자 자리에 머물렀다.
분위기가 반전된 건 HBM의 등장 이후다.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로 HBM을 개발했을 당시만 해도 업계에서는 '지나치게 빠른 기술'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시장성이 낮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생성형 AI의 급성장으로 AI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면서 상황은 뒤집혔다.
AI 훈련용 GPU 시장에서 글로벌 점유율 90%대를 차지하는 엔비디아가 SK하이닉스를 HBM 공급사로 선정하면서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와의 점유율 격차를 빠르게 좁혔다.
결국 올해 초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에서 삼성전자를 제치고 글로벌 1위에 올랐다. 이 같은 기세는 2분기에도 이어졌고, 업계는 3분기에도 SK하이닉스가 1위를 지킬 것으로 전망한다.
◇ HBM4부터 ‘삼성의 반격’ 시작된다 = HBM 주도권을 놓친 삼성전자도 반격을 예고하고 있다. 내년 초부터 본격 개화할 것으로 전망되는 HBM4(6세대 HBM)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삼성전자·마이크론이 점유율 경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로 HBM4 개발을 완료하고 양산 체계를 구축했으며, 삼성전자도 1c D램 미세공정으로 HBM4를 개발하고 베이스다이에 자사 파운드리 4나노 공정을 적용했다.
최대 고객사인 엔비디아 역시 HBM4부터는 늘어나는 수요를 감안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모두 공급사로 채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이 시점을 기점으로 양사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HBM 점유율 3위인 마이크론도 대규모 투자로 기술 격차를 좁히며 경쟁 구도에 합류할 채비를 하고 있다. 미국의 견제에 대응해 기술 자립을 추진하는 중국 역시 HBM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 CXMT는 내년 중 HBM3E(5세대 HBM) 개발을 완료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응해 국내 기업들은 HBM4E(7세대 HBM) 개발을 앞당기는 한편, 차세대 제조기술 개발에도 투자를 확대하며 기술 격차 벌리기에 나서고 있다. 또 CXL(컴퓨팅 익스프레스 링크), PIM(프로세싱 인 메모리) 등 차세대 AI 반도체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