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더스의 홋카이도 치토세시에 있는 'IIM-1' 첨단 칩 시험 생산라인. (사진=라피더스 홈페이지)
라피더스의 홋카이도 치토세시에 있는 'IIM-1' 첨단 칩 시험 생산라인. (사진=라피더스 홈페이지)

[서울파이낸스 서종열 기자] 일본 정부가 자국의 차세대 반도체 전략의 핵심 기업인 '라피더스(Rapidus)'에 11조원가량의 공공 자금을 추가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민간투자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가 직접 자금을 넣고 경영 통제권까지 확보하며 2나노 공정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미국·일본 협력이 강화되는 흐름 속에 한국 반도체 산업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전망이다.

◇ 日, 11조 추가 투입···누적 지원액만 27조 돌파 = 23일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일본 경제산업성은 2027 회계연도까지 라피더스에 단계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계획을 최종 확정했다. 올해 안에 1차 투자를 집행하고 2026~2027년에 걸쳐 투입 규모를 확대한다.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재정은 1조1800억엔(약 11조1000억원)으로, 누적 지원액은 2조9000억엔(약 27조3000억원) 규모로 불어난다.

경제산업성은 라피더스의 개발 일정이 일본 반도체 산업 경쟁력에 직결된다고 판단해 R&D 예산도 추가 확보했다. 당초 계획에서 지연 없이 2나노 양산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지원 체계를 정비한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 내부에선 "2나노 전략이 흔들릴 경우 일본의 반도체 부활 전략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적지 않다.

이번 조치의 핵심은 정부가 단순한 재정부담을 넘어 경영 통제력까지 직접 행사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닛케이는 일본 정부가 기술 제휴나 지분 변동처럼 전략성이 높은 사안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황금주(골든 셰어)' 확보 방침을 정했다고 보도했다. 공적 재원 투입에 맞춰 정부가 경영 안정성을 직접 관리하겠다는 의미다.

라피더스는 2022년 도요타·소니·NTT 등 일본 대표 기업 8곳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연합 파운드리 기업이다. 이미 홋카이도 지토세 공장에서는 2나노 시제품 라인이 가동 중이며, 2027년 양산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후 1.4나노, 1.0나노까지 공정 개발을 확장하겠다는 공격적 로드맵도 내놨다.

◇ 일본의 총력전 전략에 K-반도체 위기감 높아져 = 일본의 반도체 산업 총력 지원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도 상당한 압박 요인이 되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은 TSMC와 삼성전자가 양강 체제를 구축해왔지만, 일본이 막대한 국가 지원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경쟁에 뛰어들 경우 '3강(三强) 구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업계에서는 라피더스가 2027년 2나노 양산에 성공한다면 미국 공급망에서 일본의 입지가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본다. 미국은 이미 일본과 반도체 동맹을 강화하고 있으며, TSMC의 일본 2공장 증설, 일본 장비·소재 기업의 미국 투자 확대 등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일본이 2나노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 미국 내 첨단공정 공급망에서 한국 기업의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삼성전자 파운드리에는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삼성은 2나노를 거쳐 1.4나노 공정 양산을 2027년으로 잡고 있지만 라피더스가 일본 정부의 전폭적 자금 지원과 기술 집중을 통해 속도를 높이면 글로벌 고객사 확보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국내 반도체 생태계에도 간접 영향이 예상된다. 일본은 이미 포토레지스트, 실리콘웨이퍼, 세라믹, SiC(실리콘카바이드) 등 핵심 소재·장비 분야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가진 만큼, 이를 R&D와 파운드리까지 하나의 체계로 묶어낼 경우 국가 단위의 반도체 밸류체인 재편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소재·장비 조달 구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국가 총력전' 모델이 장기적으로 한국의 반도체 정책에도 변화를 요구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현재 한국 역시 반도체 특화단지 조성, R&D 세액공제 확대 등을 추진하고 있으나 일본처럼 국가가 직접 리스크를 부담하는 구조와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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