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오세정 기자] 국내 시멘트 업계가 '침체의 늪'에 빠진 가운데 한일시멘트가 자회사 한일현대시멘트를 흡수합병하며 경영 효율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번 합병으로 한일시멘트는 단숨에 업계 1위 사업자로 올라설 전망이지만 단순한 점유율 확대 이면에는 지배구조 단순화와 비용 절감이라는 '불황기 생존 전략'이 담겼다. 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들며 뚜렷한 생존 전략이 부재한 상황에서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선 것이라는 게 업계 해석이다.
1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한일시멘트는 오는 19일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한다. 한일시멘트는 한일현대시멘트 지분 77.78%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한일시멘트가 존속회사가 되며, 한일현대시멘트는 소멸된다.
임시주총에서 해당 안건이 의결되면 합병 반대의사 통지 접수, 주식매수청구권 접수, 채권자 이의 제출 등을 거쳐 11월 1일자로 두 회사가 통합된다. 앞서 지난 7월 17일 양사는 각각 이사회를 열고 합병에 대한 안건을 의결한 바 있다.
한일시멘트의 한일현대시멘트 흡수는 예견된 수순이었다는 게 업계 시각이다. 한일시멘트의 지주사인 한일홀딩스(옛 한일시멘트)는 2017년 LK투자파트너스와 함께 투자목적회사 HLK홀딩스를 설립해 현대시멘트를 인수했다.
2019년에는 매수청구권(콜옵션) 행사로 LK투자파트너스의 HLK홀딩스 지분을 인수해 단일 지배력을 확보했다. 이어 2020년 한일시멘트가 HLK홀딩스를 흡수합병하며 현대시멘트를 자회사로 편입했고, 이후 장내 매수와 출자 전환을 통해 현재 지분율 77.78%를 보유하고 있다.
다만 업계가 주목하는 것은 합병이 실행된 '시점'이다. 이번 합병의 이면에 있는 경영효율화 압박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시멘트 수요가 급감하고 탄소 규제가 강화되는 최악의 경영 환경 속에서 불필요한 비용 구조를 정리하고, 자원 배분을 효율화해야 할 절박함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실제 시멘트 업계는 2024년을 기점으로 뚜렷한 수요 위축을 겪고 있다. 국내 시멘트 생산량은 2011~2023년 5000만톤 내외의 출하량을 유지했으나 지난해 4793만톤으로 급락했다.
올 상반기는 전년 동기 대비 무려 17.4%나 급감한 1888만톤에 그쳤다. IMF외환위기(2148만톤), 금융위기(2404만톤)에도 무너진 적 없는 2000만톤대가 사상 처음으로 무너진 것이다.
건설 경기는 적어도 2027년은 돼야 회복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 가운데 탄소배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탄소배출 저감과 순환자원 설비투자 등 지출 비용은 늘어나는 상황이다.
이번 합병은 실질적으로는 이미 하나였던 회사를 법적으로 단일화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한편, 중복 인력 및 설비 투자·관리, 자금 운용 비효율 등을 해소하고 경영 구조를 효율화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배구조 단순화나 주주가치 제고를 이룰 수 있는 것과 별개로 당장의 고정비를 줄이고 자산 운용의 통제력을 높이기 위한 구조 정비란 해석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결정이 불황기의 생존 해법으로 지배구조 단순화 및 비용 최적화의 가능성을 제기했다고 본다. 특히 아세아시멘트가 한라시멘트를 100% 자회사로 두고 있는 상황에서 경영상 의사결정에 이번 사례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단 관측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업황이 최악의 상황에서 시멘트 회사들은 고정비·운영비 절감을 위한 노력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데 한일시멘트의 경우 사실상 같은 사업을 두 개 회사로 영위하면서 경영 효율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라며 "회사로서는 최선의 전략적인 선택을 했고 업계 입장에서는 불황기 돌파구로 지배구조 개편·구조조정 등을 경영 효율화 방안으로 고려할 가능성을 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사한 사례로 아세아시멘트와 한라시멘트가 있는데 경영 전략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한일시멘트 합병법인 출범으로 시멘트 시장 구조는 대대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일차적으로는 기존 7개사 체제에서 6개사 체제로 전환된다. 오랫동안 유지돼 온 업계 선두 기업의 순위도 변동할 전망이다. 이번 합병으로 한일시멘트는 매출 1조6635억원, 영업이익 2691억원(영업이익률 16.2%) 규모(지난해 양사 실적 단순 합계)로 재편된다. 이는 지난해 업계 1위였던 쌍용C&E의 실적을 뛰어넘는 수치다.
지난해 기준 합병법인의 점유율도 21.76%(한일 11.08%·한일현대 10.68%)로, 지난 14년간 점유율 1위를 기록해 온 쌍용E&C(21.20%)를 넘어서게 된다. 시멘트 제조의 핵심 설비인 킬른(소성로) 보유 수량에서도 쌍용C&E 10기와 통합 한일시멘트 9기(한일 6기, 한일현대 3기)로 사실상 대등해진 만큼 시장 1위 자리를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각 시멘트회사들은 '올해만 버티자'라는 심정으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위기 상황에 놓여있다"면서 "업계 판도 변화보다는 각자의 생존 전략에 더 집중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