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오세정 기자] 건설 현장에서 레미콘을 직접 생산하는 배치플랜트(BP) 설치 규제가 완화되고 있다. 정부는 공사비 절감과 품질 제고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레미콘 업계는 매출 급감을 우려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가운데, 토목 및 인프라 중심으로 설치되던 BP 활용 비중이 주택 건설 현장으로 확산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2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BP 기준을 완화하는 내용을 담은 '건설공사 품질관리 업무지침 개정안'에 대해 행정 예고를 하고, 지난달 20일까지 의견 수렴 절차를 마쳤다. BP는 공사장에서 시멘트, 모래, 자갈 등의 재료를 조합해 균일한 레미콘을 생산하는 시설이다.
개정안은 90분 내에 레미콘 믹서트럭으로 운반이 불가능한 도서·벽지 지역, 교통체증 지역 등에서 BP 설치가 가능하다는 규정을 없앴다. 또한, 시공사뿐만 아니라 발주자도 BP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으며, BP로 생산된 레미콘을 공급할 수 있는 물량을 소요량의 50% 이하로 제한하는 규정도 삭제했다. 여기에 발주자 또는 시공자가 인근 건설 현장에 레미콘을 반출할 수 있도록 했다.
서울 내 건설 현장에서 레미콘의 원활한 공급과 품질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실제로 2022년 삼표 성수 레미콘 공장이 문을 닫은 이후, 서울 도심 내 레미콘 수급이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서울에 있는 레미콘 공장은 강남구 세곡동 천마콘크리트, 송파구 장지동 신일씨엠, 송파구 풍납동 삼표산업 등 3곳에 불과하며, 올해 말에는 풍납 공장마저 철거될 예정이다. 서울 내 건설 현장 대부분은 경기도와 인천에 위치한 공장으로부터 레미콘을 공급받고 있으며, 교통 체증 등으로 레미콘 타설이 가능한 90분을 초과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졌다.
정부는 이번 지침 개정을 통해 3기 신도시 건설 현장과 1기 신도시 재건축 현장 등 대규모 공공공사 현장에서 BP 설치를 적극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도 현장에 사용할 레미콘 공급을 위해 정부에 BP 설치가 필요하다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BP 설치를 통해 골재 등의 품질 관리를 강화하고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건축 현장에는 BP를 직접 설치한 사례도 있다. 현대건설은 서울 서초구 반포주공 1단지 1·2·4주구 재건축(반포 디에이치 클래스트) 현장에 BP를 설치해 사용 중이다. 이는 주택 건설 현장에 BP가 들어간 첫 사례이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지난해 초 착공 시 레미콘 수급 불안정 문제가 있었고, 교통량 증가로 해당 구청에 민원이 많았다. 조합과 협의를 통해 BP를 설치하게 됐다"며 "골조 작업에 영향을 주지 않는 유휴 부지가 있어 구청 허가를 받아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민간 주택 건설 현장에서 BP 설치가 늘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BP 설치는 안정적인 레미콘 수급을 보장하는 장점이 있지만, 설치 비용이 적지 않고, 조합과의 협의 및 지자체 허가 등의 행정 절차가 복잡하다. 특히 이번 개정안에 대해 협력 관계인 레미콘 업계가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점도 걸림돌이 된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BP를 설치할 때 발생하는 비용 문제는 큰 고민거리가 된다. 이를 떠안는 비용이 상당하며, 안정적인 수급을 위해 BP를 설치한다고 하더라도 조합 측의 동의를 얻기 쉽지 않다"며 "지방자치단체에 BP 설치 신고 등 행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레미콘 업계의 반발 등 여러 난관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민간 현장에서 BP 설치가 확산될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레미콘 업계에서는 BP 확대 적용 시 대부분 중소기업인 레미콘 업체들이 경영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한국레미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와 한국레미콘공업협회, 서울경인레미콘공업협동조합은 의견서를 통해 "레미콘 업체들은 최악의 건설 경기 침체 속에서 2024년 가동률이 역대 최저인 17%를 기록했다. 이는 1998년 IMF 당시의 29.6%보다도 낮은 수준"이라며 "BP 설치 조건을 완화해 새로운 공급자가 진입하는 것은 건설 자재 업체들을 고사시키는 역차별"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주변 레미콘 업체들의 수주 기회를 빼앗고, 생산 과잉을 부추겨 업계 생존을 위협할 것"이라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전국 1079개 레미콘 업체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한 레미콘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다수공급자계약(MAS) 제도 개편으로 레미콘 적시 공급이 가능해졌고, 최근 건설 경기 침체로 물동량이 줄어 현장 납품에는 문제가 없다"며 "특정 현장 외에 인근 현장에 외판까지 허용하면, 경쟁이 심화된 레미콘 시장에 과잉 투자가 발생할 수 있고, 품질 문제 발생 시 책임 소재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