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 (사진=김현경 기자)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 (사진=김현경 기자)

코로나19로 주춤했던 금융권 글로벌 진출이 속도를 내고 있다. 'K-금융'이란 명패를 달고 포화상태인 국내 시장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서의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이 중 동남아시아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 K-금융의 주 무대가 되고 있다. 넘어야 할 산도 적잖다.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고 각국의 자국민 보호 기조가 강화되면서 동남아시아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성장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서울파이낸스는 창간22주년 기획기사로 급변하는 글로벌 금융환경 속에서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K-금융의 성장 전략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서울파이낸스 (싱가포르) 김현경 기자] 신흥 금융중심지 싱가포르가 글로벌 자본을 무섭게 빨아들이고 있다. 유럽과 중동, 동아시아를 잇는 요충지이자 투자 '붐(Boom)'이 일고 있는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길목이란 지리적 이점으로 글로벌 금융회사들의 아시아 지역본부가 싱가포르에 모이고 있다.

싱가포르는 '중국화(化)'로 정치적 리스크가 커진 홍콩을 떠나고자 하는 글로벌 기업들을 적극 유치하며 세계 금융 허브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안정적인 정치·경제 환경과 예측가능한 감독당국 규제, 낮은 법인세 등 싱가포르의 기업 친화적인 환경은 홍콩의 대안으로 손색이 없다.

올해 초 발간된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4200개 다국적 기업의 아시아 지역본부가 싱가포르에 설립됐다. 현재 싱가포르에 진출한 글로벌 금융회사도 600여곳에 달한다.

국내 은행권에선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4대 시중은행과 산업·수출입은행 등 2개 국책은행이 진출해있다. 한국계 은행들은 달러펀딩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싱가포르에서 본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비즈니스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러한 싱가포르에서 최근 한국계 은행들의 비즈니스에 영향을 미칠 환경적·제도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싱가포르에 모이면서 경쟁이 치열해진 탓에 새로운 비즈니스를 빠르게 발굴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싱가포르 정부가 자국민 채용을 확대하고 외국인 전문인력을 유치하고자 'COMPASS(EP 비자 신청 평가제도)'를 도입하는 등 외국인 취업비자 발급 요건을 나날이 강화하고 있는 것도 우려 요인이다.

싱가포르에 진출한 한국계 은행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방안으로 '현지화(Localization)'를 꼽는다. 현지인 직원 채용을 늘리는 것은 물론 글로벌·로컬 기업을 대상으로 비즈니스 외연을 확장, 글로벌 은행으로서의 모습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 10 콜리어 키(Collyer Quay) 오션파이낸셜센터에 위치한 KB국민은행 싱가포르 지점(왼쪽)과 하나은행 싱가포르 지점(오른쪽)이 위치한 인근 30 세실스트리트(Cecil Street) 프루덴셜타워 안내판. (사진=김현경 기자)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 10 콜리어 키(Collyer Quay) 오션파이낸셜센터에 위치한 KB국민은행 싱가포르 지점(왼쪽)과 인근 하나은행 싱가포르 지점(오른쪽)이 위치한 30 세실스트리트(Cecil Street) 프루덴셜타워 안내판 (사진=김현경 기자)

◇"현지 고객을 잡아라"···IB·리테일 등 각양각색 '현지화' 전략

현지화의 첫 번째 단계는 현지인 채용을 늘리는 것이다. 현지 고객과의 접점 및 네트워크를 확대하려면 싱가포르 당국 규제와 현지 금융인프라에 해박하고 현지 업무 경험이 있는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도입된 COMPASS 제도도 한국계 은행들의 현지인 채용 속도를 높이는 요인이다. COMPASS에 따라 싱가포르 정부로부터 주재원 취업비자를 승인 받으려면 전체 직원의 일정 비율 이상을 현지인으로 구성해야 한다. 싱가포르에서 비즈니스 확장을 위해 주재원 수를 늘리려면 현지인 채용도 그만큼 확대해야 한다.

싱가포르 진출 한국계 시중은행 4곳 가운데 현지인 채용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KB국민은행이다. 지난 2022년 1월 문을 연 국민은행 싱가포르 지점은 개점 첫해 19명이었던 현지 직원을 현재 50명까지 늘렸다. 주재원 17명을 포함하면 총 직원수는 67명이다. 이는 국민은행 전체 해외 지점들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수준이다. 싱가포르 진출 역사가 30~50년인 하나은행(49명), 신한은행(40여명), 우리은행(32명)보다도 많다.

정동욱 국민은행 싱가포르 지점장은 "지점 직원수를 최소 100명 이상으로 늘리고 현지 직원 비중도 대폭 확대할 예정"이라며 "비즈니스 포트폴리오와 지역 커버리지도 더 넓힐 계획인데, 지난 3년간은 그 계획들이 실현 가능하도록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영업 3년차인 국민은행이 빠르게 덩치를 키운 것은 싱가포르 지점에 부여된 '중추지역(Regional Hub·리저널 허브)' 역할 때문이다. 국민은행은 싱가포르 지점을 아시아-태평양 지역(APAC) 본부로 키우려는 명확한 목표를 세웠다. 홍콩 지점에 있던 아시아심사센터를 싱가포르 지점으로 이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싱가포르의 경우 금융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어 APAC 국가들 가운데 자금조달 비용이 가장 저렴하다. 베트남·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APAC 지역 내 대부분의 딜(Deal)이 싱가포르에서 이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지점이 APAC 내 비즈니스 확장을 위한 핵심 조달·공급창구가 되는 것이다.

리저널 허브로서 △CM(Capital Market·자본시장) △CB(Corporate Banking·기업금융) △IB(Investment Banking·투자금융) △아시아심사센터 △글로벌핀테크랩 등 주요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는 국민은행 싱가포르 지점은 현지 기업과 다국적 기업 등을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를 추진, 본격적인 '현지화'에 나서고 있다. 한국계 은행들은 특성상 한국계 지상사와의 거래 비중이 클 수밖에 없는데, 이같은 구조에서 탈피해 현지·다국적 기업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이 계획을 실현하려면 CM, CB, IB 등 각 부문의 유기적인 협업이 필수적이다. 이 중 가장 먼저 집중한 부문은 CM이다. CM 강화를 위해 개점 초기 본사에서 외화자금 조달업무를 총괄하는 자금팀장 출신이 주재원으로 합류했고, 지난 2년여 동안 7~8가지 자금조달 소스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싱가포르 지점은 은행뿐 아니라 APAC에 진출한 다른 KB 계열사 지점들을 위한 자금조달 기능과 채권·파생상품 투자 업무까지 담당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현지화'를 위한 핵심 기능인 CB·IB 부문의 경우 최근 현지 RM(기업금융전담역)을 채용하는 한편, 글로벌 IB 미즈호 출신의 에이전트뱅킹(Agent Banking·대리은행) 담당 직원을 영입하며 조직력을 키웠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 8월에는 도이치뱅크와 협업해 태국에 진출한 KB 계열사를 대상으로 바트화와 달러 간 통화스와프 거래를 체결했다. 최근에는 항공기금융 신디케이티드론 IRS(금리스와프) 거래에도 참여했다. 전통적인 은행 대출 이자장사 업무에서 나아가 수수료(Fee) 비즈니스 기회를 모색, 글로벌 IB들과 경쟁할 수 있는 '현지' 은행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정 지점장은 "신디케이티드론에 참여하고 통화·금리스와프를 체결하는 비즈니스는 싱가포르 내 글로벌 플레이어들은 다 하는 딜"이라며 "한국계 금융기관 중 해외에 있는 지점이 이렇게 글로벌 플레이어·고객을 상대로 딜을 성사시킨 사례가 많지 않은데,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참여하는 영역으로 열심히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계 은행들이 모여있는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 (사진=김현경 기자)
한국계 은행들이 모여있는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 (사진=김현경 기자)

하나은행 싱가포르 지점은 한국계 은행들 가운데 유일하게 싱가포르달러 조달이 가능한 곳이다. 지난 1973년 5월 싱가포르에 진출한 '터줏대감'으로 탄탄한 현지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싱가포르달러 조달 기능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현지 한국계 기업과 교민을 대상으로 하는 리테일 영업에 가장 역량 있는 은행으로도 평가된다. 현재 하나은행 싱가포르 지점 직원(49명)의 약 40%인 19명이 리테일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싱가포르달러 영업 확대를 통해 현지 고객 수요에 맞춰나가는 '현지화'된 은행이 이 지점의 목표다.

윤태선 하나은행 싱가포르 지점장은 "현재 싱가포르달러를 계좌 간 직접 이체할 수 있는 은행은 한국계 중 우리가 유일한데, 하나은행이 싱가포르달러 결제망에 유일하게 가입돼 있기 때문"이라며 "싱가포르에서 사업하는 한국계 기업들은 현지 통화로 거래하는 경우가 많은데, 싱가포르 로컬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하나은행 계좌를 이용하는 게 용이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윤 지점장은 또 "싱가포르달러 영업을 확대할 계획"이라며 "현지 교민과 주재원, 한국계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는 싱가포르달러 수요가 많은 편이고 로컬 기업들과도 거래를 확대하는 게 장기적인 방향성"이라고 부연했다.

한국계 은행들 가운데 총자산 26억3200만달러(약 3조574억원)로 자산 규모면에서 가장 앞선 하나은행은 향후 대출, 채권, 유가증권 등 다양한 자산을 유기적으로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싱가포르 내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외형을 확대하겠다는 복안이다.

장현우 하나은행 싱가포르 지점 팀장은 "외형적인 면에서 우리 북사이즈가 25억~26억달러 수준인데, 하나은행과 비슷한 글로벌 크래딧 수준의 싱가포르 내 은행 지점들과 비교하면 아직 작은 수준"이라며 "대출자산뿐 아니라 유가증권, 채권 자산 등의 사이즈를 유기적으로 키우는 게 앞으로의 방향성"이라고 했다.

싱가포르 거리 은행 영업점 (사진=김현경 기자)
싱가포르 거리 은행 영업점 (사진=김현경 기자)

◇나날이 중요해지는 내부통제···해외도 '리스크관리' 최우선 과제

현재 국내 금융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내부통제'다. 횡령, 부정대출, 대규모 상품 손실, 보안 등 금융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금융회사들에 대한 한차원 높은 리스크관리 역량이 요구되고 있다.

해외 지점들도 같은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해외에서 열심히 쌓은 공든 탑이 단 한번의 사고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진출 한국계 은행들은 공통적으로 리스크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하나은행 싱가포르 지점의 경우 리테일 업무를 영위하는 만큼 내부통제 리스크에 더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은행 입장에서는 고객 간 거래의 적정성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야 하는 등 부담이 크다. 국내 금융권의 내부통제 이슈에 더해 전 세계적으로 자금세탁방지업무(ALM)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라 리스크관리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윤태선 지점장의 설명이다.

윤태선 지점장은 "ALM 관련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 속에서 리테일을 한다는 것은 은행 입장에서 리스크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라며 "계좌 개설할 때 누구인지 다 확인해야 하고 송금된 돈이 수상한지를 실시간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손이 굉장히 많이 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금융회사들이 리테일을 꺼리는 이유이기도 하다"며 "하나은행은 오래 전부터 리테일 업무를 해왔고, 고객들과 계속 함께 가자는 공공성 취지에서 리스크관리에 신경쓰면서 업무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민은행도 리스크관리 전문인력을 채용하는 등 관련 조직 강화에 힘쓰고 있다. 지점 내 리스크관리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CRO(리스크관리최고책임자)와 운영리스크 매니저도 영입했다. 한국 금융기관 중 지점 수준에서 운영리스크 매니저를 따로 두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그만큼 국민은행 싱가포르 지점이 리스크관리에 신경쓰고 있다는 의미다.

정동욱 지점장은 "컴플라이언스(준법감시), 리스크관리, 싱가포르통화청(MAS) 규제 절차에 따른 체계와 관련된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리스크관리 조직을 굉장히 세게 구축했다"며 "싱가포르 감독당국 체계에 맞는 운영리스크 시스템 향상 작업을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파이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