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서종열·여용준 기자] 지난 4월 초, 삼성전자의 대표이자 DX부문장(디바이스 경험 부문)으로 재직하던 한종희 부회장이 갑작스레 타계했다.
전자 업계의 신사로 불리며 TV 사업을 세계 1위로 올려놓고, 이후 모바일·가전·반도체를 아우르는 '통합 리더' 역할을 수행했던 그는 이재용 회장의 핵심 참모로 꼽혀왔다.
그러나 그의 급작스런 타계 이후 삼성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후임으로 노태문 MX부문 사장을 DX부문장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이제 삼성의 소비자 가전과 모바일 사업은 물론, 반도체와의 전략적 연결까지 노태문 체제 아래서 새판짜기에 돌입했다.
◇ "안정 대신 혁신"···노태문式 전략이 시작되나 = 노태문 사장은 삼성전자 스마트폰 개발과 브랜드 재편을 주도한 전략가로 평가받는다. 2020년부터 MX(Mobile eXperience)부문을 이끌며 갤럭시 Z 시리즈의 글로벌 성공을 이끌었고, MZ세대 중심의 마케팅 혁신에도 강점을 보여왔다.
그런 그가 한종희 부회장의 후임으로 DX부문 전체를 책임지게 되면서, 삼성의 전략에도 변화가 예고된다. 단순히 기존 기조를 계승하는 수준을 넘어, 소비자와 시장 중심의 민첩한 전략 구사, 그리고 AI·디바이스·서비스의 통합 생태계 강화가 핵심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삼성전자 내부 한 관계자는 "노 사장은 위기 국면에서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스타일로, 지금의 반도체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인사로 해석된다"며 "DX-DX 연계 전략, 반도체의 서비스 연계 활용 등 새로운 방향이 모색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한종희 체제의 장점이 '조직 안정'과 '품질 기반의 보수적 경영'이었다면, 노태문 체제는 보다 민첩하고 시장 지향적인 조직 개편으로 이동 중이다. 단순히 DX부문에 국한되는 것 아니라 반도체를 총괄하는 전영현 부회장과의 협력을 통해 D램·낸드 등 범용 메모리 부문에서도 조직 효율화와 집중 투자가 동시에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삼성은 올해 들어 HBM과 파운드리 조직을 중심으로 R&D 인력을 재배치하고 있으며, 글로벌 AI 반도체 전문가 20여 명을 영입하는 등 고성장 분야에 대한 인재 수혈도 강화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이 직접 챙기고 있는 '글로벌 인재 확보 프로젝트' 역시 DX-DX 간 시너지 창출을 위한 준비로 읽힌다.
◇ "기술만으론 부족하다"···고객 접점 강화와 전략 통합 가속화 = 삼성은 국내 평택 캠퍼스를 'AI 반도체 생산의 심장부'로 전환하고 있다. 기존에는 D램·낸드를 별도로 운영했지만, 최근 HBM·AI 최적화 메모리를 중심으로 한 융합 생산체계를 도입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대량 생산이 아닌, 고부가 메모리 중심의 전략 전환을 의미한다.
화성 라인 역시 EUV 기반의 초미세 공정에 특화된 파운드리 생산 기지로 개편 중이다. TSMC와의 기술 격차를 좁히려면 고객 수요 반영 속도가 관건이라고 판단해서다. 이는 노태문 사장이 강조해온 '시장 반응 기반 혁신'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HBM 시장에서 뒤처진 배경 중 하나로 지목된 '시장·고객과의 소통 부족' 문제도 변화의 대상이다. 노태문 사장은 MX부문 재직 시절 '갤럭시 팬 커뮤니티'와 같은 고객 피드백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며 브랜드 경쟁력을 강화해왔다. 이 같은 방식은 DX부문 전체, 특히 DS(반도체) 부문에도 확대될 전망이다.
◇ “변화는 불편해도 늦어지면 위험하다"···이재용의 승부수 = 한종희 부회장의 서거는 삼성에게 슬픔이자 위기였지만, 동시에 리더십 리빌딩의 촉매제가 됐다. 노태문 사장 체제가 빠르게 안착하며 조직이 예상보다 빠르게 재정비된 것도 이재용 회장의 판단력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회장은 최근 반도체 및 DX 주요 임원들과의 회의에서 "변화는 불편하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늦는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닌 조직 전체의 사고방식과 경영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 것이다.
삼성은 이제 '리셋' 이후의 방향 설정에 집중하고 있다. △DX-MX-DS 간 통합 시너지 △시장 중심의 의사결정 체계 △글로벌 인재 확보와 AI 특화 전략 등이 핵심 과제로 꼽힌다.
노태문 사장의 새로운 리더십과 함께, 삼성은 다시금 '초격차'라는 단어를 현실로 되돌릴 준비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