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 대표(왼쪽)와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 (사진=HD현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 대표(왼쪽)와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오른쪽) (사진=HD현대)

[서울파이낸스 서종열·김완일 기자] 미국과 한국이 조선업을 고리로 손을 맞잡는다. 통상 협력의 장을 넘어, 이제는 전략산업 전반에서 미국이 한국을 동맹 이상의 '산업 파트너'로 대우하는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본격화된 미국 내 조선업 재건 전략에 한국의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중심축으로 부상하면서, 양국 간 협력이 '군함·MRO(정비)·항만 장비' 등 특수선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16일 정부 및 조선업계에 따르면 제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 회의에 참석한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는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수장들과 잇따라 면담했다. 이번 회동은 미국 측의 요청으로 성사됐으며, 비공개로 진행됐다.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은 그리어 대표와의 공식 회담에서 "미국의 조선산업 재건 의지를 높게 평가한다"며 "HD현대는 공동 기술개발과 선박 건조, 인력 양성까지 전방위적 협력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특히 정 부회장은 HD현대삼호의 크레인 제조 기술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산 항만 크레인이 독점한 미국 항만설비에 HD현대삼호를 통한 공급망 다변화 협력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김희철 한화오션 대표는 미국 내 조선 생산 기반 확대와 기술 이전 방향을 중심으로 공급망 안정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한화오션의 전략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현재 거제사업장의 스마트 생산 시스템을 미국 필리조선소에 적용할 계획이며 다양한 수요와 장기적인 생산 역량 확보를 고려해 미국 내 추가적인 생산 거점 설립도 검토 중이라 밝혔다.   

한화오션은 이미 작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민간 조선사 '필리 조선소'를 인수해 미국 MRO 시장에 본격 진입한 상태다. 현재 미국 해군으로부터 유콘(Yukon)·월리 쉬라(Wally Schirra) 등 함정 정비 사업을 수주하며, 발 빠르게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미국이 우리나라 조선업계와 전례 없는 수준의 협력 공세에 나선 배경으로는 중국과의 해양패권 경쟁에서 밀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현재 해군함정 총톤수(450만~500만톤)에서 2위인 중국(250만~300만톤)을 압도하지만, 전투함 척수(219척)에서는 1위인 중국(234척)에 밀리고 있다.

문제는 미국 조선업 기반 시설 자체가 사실상 붕괴된 상태라는 점이다. △숙련 인력 부족 △노후화된 생산 인프라 △중국산에 의존된 부품 공급망 등으로 자국 내 대형 군함조차 제대로 수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생산력 차이를 동맹국인 한국의 조선업을 활용하겠다는 게 트럼프 정부의 구상이다.

미국 의회는 일단 '해군준비태세 보장법(Navy Readiness Act)' 등 동맹국을 통해 함정을 건조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군함 건조를 우리나라 조선업체에 위탁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마련에 나선 상황이다. 

국내 조선업체들 역시 미국과의 협력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HD현대는 지난 4월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인 헌팅턴 잉걸스(HII)와 '선박 생산성 향상 및 첨단 기술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실질적 협력을 나섰고, 현지 직접 투자도 검토 중이다.

한화오션 김희철 대표(왼쪽)가 16일 오후 미국무역대표부(USTR)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와 만나 조선산업 협력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김희철 한화오션 대표(왼쪽)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 대표(오른쪽) (사진=한화오션)

한화오션은 필라델피아 조선소 인수 외에도, 한화시스템과의 시너지를 통해 인공지능(AI) 기반 함정 관리 솔루션 및 디지털 트윈 정비 시스템 등으로 미국 해군의 기술적 신뢰를 얻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단순 정비뿐 아니라, 중장기적으로는 미군의 신형 군함 설계와 일부 건조를 한국 기업이 맡는 구조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이번 회담의 또 다른 상징성은 통상 이슈와 군사 산업이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HD현대·한화오션과의 조선협력 논의는 같은 날 진행된 그리어 대표와 안덕근 산업부 장관 간 고위급 통상 협의에 앞서 열렸고, 이 자리에서 논의된 안보 산업 협력이 미국의 관세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중국 견제'를 위한 해상 전략 재정비를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으며, 조선업 재건을 위한 보조금, 세금 면제 등 전방위적 인센티브 정책을 예고했다. 또 중국산 선박에 입상수수료 부과를 천명하며, 공급망에서 중국을 밀어내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하고 있다.

산업계 일각에서는 미국 내 조선업 협력이 단기적으로는 기회지만, 장기적으로는 리스크도 내포하고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HD현대와 한화오션이 미국 현지에 공장이나 인프라를 구축할 경우 수익성 문제 이외에도 기술 이전 우려, 정치 변수에 따른 리스크 등이 뒤따를 수 있어서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현지 투자 전 인프라, 인력, 부품 수급망 등 면밀한 사전 점검과 동시에 장기간에 걸친 경영전략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미국과의 특수선 협력이 주는 전략적 기회는 명확하다. 단순 수출을 넘어, 세계 해양 안보와 산업 공급망 재편 과정에 한국 조선업계가 미국의 대양패권 경영의 핵심 파트너로 참여한다는 점 때문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지금은 안보가 산업이고, 산업이 곧 외교가 되는 시대"라며 "HD현대와 한화오션이 단순 수주를 넘어, 미국과의 '해양 동맹'을 어떻게 구축해나갈지에 조선업계뿐 아니라 정부의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파이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