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문영재 기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고립주의 외교정책이 더욱 뚜렷해지면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유럽연합(EU)의 국방력 강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신속한 납기, 검증된 품질, 가격 경쟁력을 갖춘 국내 방산 업계가 새로운 수출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2일 방산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외교·안보 분야에서 개입주의 대신 고립주의 기조를 분명히 하고 있다. 냉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세계의 경찰’ 역할에서 벗어나 실리를 우선하는 전략을 추진하는 모습이다. 헤그세스 국방장관도 이에 맞춰 향후 5년간 국방 예산을 매년 8%씩 줄이라는 계획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대(對)EU 안보 전략에도 변화가 감지됐다. 유럽군사령부(EUCOM) 예산이 감축 대상에 포함되면서 그동안 미국의 안보 우산에 의존해 온 EU가 자체적인 국방력 강화를 추진하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이에 EU는 최근 27개 회원국 정상에게 재무장 계획을 제안하는 동시에 8000억유로(약 1270조원) 규모의 국방 예산 투입을 결정했다.
이 중 1500억유로(약 240조원)는 유럽산 무기 구매에 사용될 예정이며, 나머지 6500억유로(약 1030조원)는 회원국 국방비 지출 확대에 투입된다. 특히 GDP 대비 국방비 지출 비중이 낮았던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의 예산이 상향 조정될 전망이다. 이는 그동안 동유럽에 편중됐던 안보 투자를 보다 균형 있게 조정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증권업계는 EU 재무장 계획 중 유럽산 무기 구매 예산(1500억유로)을 제외한 6500억유로에서 국내 방산 업체가 차지할 수 있는 비중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서·북유럽 국가들이 자국 방산 업체 보호와 EU 역내 조달을 우선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동유럽 국가들은 신속한 전력 강화를 위해 한국 방산 업체들과 협력을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태환 대신증권 연구원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동유럽 국가들은 서·북유럽 국가들의 국방 역량 강화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며 "예산이 제한적인 만큼 가격 경쟁력과 검증된 품질을 갖춘 한국산 무기가 대체 불가한 선택지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내 방산 업체들이 향후 5년간 동유럽 시장에서 확보할 수 있는 잠재적 시장 규모는 최대 849억유로(약 134조원)로 추산됐다. 이는 동유럽 회원국들의 평균 국방비 가운데 최대 80%가 무기 구매에 투입될 가능성을 고려한 수치다.
시장 수요에 부응할 가능성이 높은 업체로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현대로템이 꼽힌다. 두 기업은 동유럽 시장에서 이미 매출과 이익 성장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향후 합작법인(JV) 설립과 현지 생산 확대를 통해 유럽 내 대형 무기 교체 수요에 적극 대응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폴란드, 에스토니아, 핀란드, 터키 등에 K9 자주포와 K10 탄약운반장갑차를 공급한 경험이 있다. 지난해에는 루마니아와 K9 자주포 54문, K10 장갑차 36대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유럽 시장을 확대했다.
특히 루마니아 계약에는 현지 생산 조건이 포함돼 있어, 향후 2년 내에 루마니아 업체들과 협력해 담보비타 지역에 군수 공장을 설립할 계획이다. 이 공장은 부품 생산과 유지·보수 기능을 담당하는 거점 역할을 할 예정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대규모 유상증자를 통해 유럽 등 해외 지상 방산 분야에서 거점을 확보하고, 글로벌 톱티어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도 밝혔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관계자는 "유럽의 군비 확장이 본격화되면서 시장 진입 장벽도 높아지고 있다"며 "끊임없는 기술 혁신을 통해 지속 가능한 사업 모델을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현대로템은 폴란드에 K2 전차 180대를 수출하는 1차 계약(2023~2025년 납품 예정)이 진행되면서 높은 이익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 2-1차 계약(추정 물량 180대)도 올해 상반기 체결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 계약은 직접 구매와 현지 생산이 병행되는 방식으로 추진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현대로템은 유럽 방산 업계가 재무장 계획과 관련해 내부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상황에서 신속한 현지 파트너십 강화를 통해 유럽 시장 내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로템은 루마니아 차세대 전차 사업(약 300대 규모)에도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며 "지난해 5월 루마니아에서 진행된 K2 전차 사격 및 기동 시범 행사에서 높은 정확도, 강력한 화력, 신속한 재장전 능력을 선보이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루마니아에서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며 "향후 서유럽 및 북유럽 시장으로의 진출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