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멈춰버린 공사 현장···'채무 인수' 조항에 눈물짓는 건설사들
[현장+] 멈춰버린 공사 현장···'채무 인수' 조항에 눈물짓는 건설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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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PF 대출 안정성 위해 만들어진 '책임준공-채무인수' 조항
부동산 경기 호황 때 수주 위해 '노예계약' 수준 신탁 계약 맺은 중소·중견 건설사
"글로벌 경기 침체는 불가항력 요소···건설사가 모든 배상 책임 떠맡는 건 불합리"
1일 기자가 방문한 서울 서초구 '방배동 422-1필지 주상복합'의 현장. 신일건설이 막대한 채무 인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업회생에 돌입한 뒤 5개월 째 공사현장이 방치되고 있다. (사진=박소다 기자)
1일 기자가 방문한 서울 서초구 '방배동 422-1필지 주상복합'의 현장. 신일건설이 막대한 채무 인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업회생절차에 돌입한 뒤 5개월 째 공정률 45% 상태에서 공사현장이 방치되고 있다.  (사진=박소다 기자)

[서울파이낸스 박소다 기자] 2020~2021년 부동산 경기 호황 당시에 수주를 위해 무리한 계약 조건에 사인한 중소·중견 건설사들이 부도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특히 원자재, 인건비가 폭등하며 '책임준공' 기한을 지키지 못한 시공사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원리금 상환은 물론 공사 지연에 따른 법적 손해배상책임마저 이중으로 지는 등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라리 기업회생절차를 선택하기도 한다. 

3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중견 건설사인 신일건설(시공능력 순위 113위)이 시공하고 있던 서울 서초구 '방배동 422-1필지 주상복합'사업의 부지와 건물에 대한 공매 공고(616억원)가 지난달 올라왔다. 지하철 4·7호선 총신대입구역이 걸어서 3분 거리인 역세권으로 작년 분양 당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회사가 기업회생절차에 돌입하며 지난 6월 공정률 45%에서 공사가 멈춘 채 5개월 넘도록 현장이 방치된 상태다. 이 외에도 여의도 신일해피트리 등 전국 11개 현장의 공사가 멈췄다. 

신일건설의 도산 원인으론 책임준공 관리형 토지신탁(이하 책준신탁) 계약으로 인한 무리한 채무 인수가 꼽힌다. 회사는 '코리아 신탁'이란 신탁사로부터 사업을 수주받았는데, 수주를 위해 책임준공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 PF 대출 원리금을 신탁사와 공동으로 상환한다 등의 불리한 조항을 계약서에 포함했다. 

책임준공이란 시공사가 발주처의 공사대금 지급 여부와 상관없이 자체 자금을 마련해서라도 준공기간 내에 공사를 완료하겠다는 약속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급보증 리스크가 커지자 시공사·신탁사 등이 금융회사로부터 PF 대출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강제 조항은 아니다. 다만 대형 건설사에 비해 신용이 낮은 중견·중소의 경우 대출 회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금융회사들이 책임준공과 채무인수 약정을 대부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사업 주체인 신탁사가 책임준공의 모든 위험을 감당할 수 없다보니 이를 시공사에 전가하고, 치열한 수주 경쟁에서 협상력이 약한 중견·중소 건설사에겐 불리한 계약조건을 내거는 것이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이 정도는 일반적이고 심하면 시공사가 책임준공을 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 손해 전체에 대해 배상 책임을 져야한다라는 '노예계약' 수준의 조항을 들이미는 신탁사도 있다"며 "주택 경기가 좋을 땐 불리한 조항이라도 일단 계약하면 사업 자체는 무리없이 진행됐기 때문에 일단 수주하는 게 우선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올해 책준신탁으로 시공사와 손해배상 소송을 벌인 한 대형 신탁사의 관계자는 "신탁사가 프로젝트 전체에 대해 책임이 있듯이, 시공사는 준공부문에서 가장 큰 책임이 있다"며 "시공사의 자금사정으로 공사가 멈추면 손해가 수십~수백억에 이르는데, 이를 신탁사의 자체 자금만으로 처리하긴 어려운 부분"이라고 했다. 이어 "시공사들이 채무인수 관련 계약을 할 때 자기자본 대비 과도한 수주인 점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짚었다. 

부동산 호황기 땐 시공사·신탁사·금융권이 수익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책임준공의 미이행이 자잿값·인건비 인상, 글로벌 공급망 차질과 경기 침체 등으로 공사기간 연장이 발생할 때다. 이때 신탁사들은 책준신탁 계약에 따라 시공사들에게 공기연장에 대한 자체 추가 공사비, 지체 보상금과 대출 이자 등의 책임을 요구하며 채무 인수를 이행하라는 입장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불리한 조항으로 책준신탁 계약을 맺은 건설 업체들 중에는 도산 위기에 몰린 곳이 여럿 있다. 취재결과 HN INC(현대 계열·133위)와 대창건설(109위), 대우산업개발(75위)도 회생절차에 돌입했거나 예정으로 확인됐다. 

또 시공능력 32위인 신세계건설도 지난 5월 대구에서 시공한 '빌리브 프리미어' 오피스텔의 책임준공 기한을 이행하지 못해 계약에 따라 PF대출 521억원의 원리금을 인수했다. 시공능력 19위 코오롱글로벌도 지난 8월 양평덕평지구 공동주택 신축공사 관련 책임준공 미이행으로 인해 600억원의 채무인수를 진행했다. 코스피 상장사 기업어음에서 'A'수준의 신용등급을 가진 신세계건설과 코오롱글로벌마저 책임준공-채무인수 계약을 맺은 것이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부동산 신탁사 참여 PF 사업장 현황(시공 순위 40~600위)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신탁사가 참여한 70개 사업장 가운데 62곳(88.6%)에서 '책임준공 기한을 지키지 못할 경우 시공사가 페널티를 감수한다'는 조건으로 채무 인수 약정을 체결했다. 이 중 11곳에서는 이미 채무 인수가 발생했고, 내년 2월까지 책임준공 시한이 돌아오는 24곳에서 추가로 채무 인수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건설업계에서는 경기 침체가 불가항력 요소인 만큼 건설사 뿐만 아니라 사업 참여자(신탁사·금융권) 등도 위험을 같이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정주 건산연 연구위원은 "책준신탁은 건설사업에서 발생하는 PF 대출 상환의무와 공기지연의 손해배상책임을 시공사가 전부 부담하게 되는 원리"라며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부동산 침체로 미분양이 급증했고, 인플레이션 등으로 공사비도 높아진 상황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계약을 맺은 상당수의 중소 건설사들이 부실 위험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그는 "토지신탁 약정의 불합리성에 대해선 쭉 문제 제기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가 책임준공 기간을 연장해주거나, 사업 약정 개정으로 사업 참여자 간 적절한 위험 재배분을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문도 연세대 금융부동산학과 교수는 "대주단 합의를 통해 부실 위험이 있는 건설사의 채무 유예 등이 진행되고 있지만, 문제가 된 사업장의 대주단에는 2금융권이나 캐피털 등의 채무도 일부 포함돼 있어 정부가 완전히 개입하긴 어려운 구조"라며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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