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김정남 피살도 北風 소재?
[홍승희 칼럼] 김정남 피살도 北風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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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홍승희기자] 선거 때마다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늘 북풍이 분다. 뭐 아직 헌재 판결도 나오지 않은 현재 상황을 대선국면이라고 미리 김칫국 마실 일도 아니지만 어쨌든 정치권은 이미 대선전에 발을 들여놓은 형국이니 또 한 번 나타날 때 됐다 싶긴 했다.

그런데 그 주제가 고작 김정남의 피살사건이라는 건 좀 아니지 싶다. 트럼프와 아베가 손잡는 시간 맞춰 북한은 고체연료를 써서 한 단계 발전된 중거리 미사일 발사시험을 했다. 하지만 이미 그 주제가 식상하다고 여겨서인지 그보다는 김정남 피살사건이 더 요란하게 언론매체를 통해 확대재생산 된다.

김정남 피살이 충격적인 사건일 수는 있겠지만 현재 한국사회가 끌어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왼 종일 밀어내도 될 만한 이슈인지는 의아하다. 대상이 김정은이라면 당장 남북관계며 한반도 정세 등 여러 면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요란해서 마땅한 일이겠지만 김정남에게 언제부터 그만한 무게가 실렸었다고 방송들이 쉴 새 없이 떠드나. 더욱이 몇 가지 있지도 않은 팩트에 근거도 불확실한 추측을 잔뜩 발라 덧붙이며 떠들어대는 걸 보자면 어처구니가 없다.

촛불을 꺼트릴 바람이라도 된다고 여기는 세력이 있나보다 싶지만 북풍의 효력은 그 바람을 일으키는 주체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주로 노년층을 중심으로만 발휘된다. 실체적 위협이 실감나기 전까지는.

따라서 일반적인 국민들에게 있어서 김정남 피살사건은 그저 시중의 가십 수준의 관심거리 밖에 안돼 보이는 데도 방송은 지치지도 않고 그 문제를 시시각각 더 나아간 정보도 없이 떠들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김정남은 폐인 취급하던 모습과는 상반되게도.

신문들이라고 조용히 넘어간 것은 물론 아니지만 방송만큼은 아니었던 듯하다. 또한 방송에 비하면 차라리 인터넷 매체들이 좀 더 균형을 잡은 듯하다. 선정적일 때는 꽤 선정적이기도 한 인터넷 매체지만 관심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꽤 냉정해지는 속성 탓인 듯하다.

스스로 ‘보수’라고 외치는 중장년층들조차도 이제 어지간한 이슈로는 북풍에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식상하다는 반응이 더 많아 보인다.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는 실감이 날 때라면 분명 달라질 테지만 가십성 이슈로 한국사회의 수많은 현안들을 덮고 가려는 언론행태에는 피로감을 보이는 것이다. 워낙 오랫동안 선거철만 되면 습관적으로 불러일으키던 북풍 이슈에 젊은이들보다 더 많이 노출됐었기에 중장년층의 피로감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철만 되면 끊임없이 어느 구석에서든 북풍이 분다. 그럴 때마다 왜 북한은 남한의 보수 세력이 정권을 잡도록 저렇게 적극적으로 도울까 싶은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정말 북한이 의도적으로 보수 세력을 돕는다면 그것도 참 큰일이겠지만 늘 때맞춰 불어주는 북풍이 신기하지 않은가.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고 따라서 정부간 접촉이 끊어졌다 해도 늘 크고 작은 일들로 접촉면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기관고장을 일으킨 어선의 표류 같은 사건이라도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 발생소식들이 평소에는 수면 아래 잠겨있다가도 늘 선거 때만 되면 수면 위로 떠오른다면 당연히 누군가 혹은 어떤 세력에 의해 고의적으로 발생하는 일로 의심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런 정보를 수집하고 취합하고 다룰 수 있는 곳이라면 의당 국가기관일 테고 그 국가기관은 당연히 ‘중립’의 의무를 지고 있을 텐데 그런 문제를 누구도 섣불리 지적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의 언론 자유는 아직 갈 길이 꽤 멀다. 밖에서나 안에서나 자유를 속박하는 견고한 틀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성인들 대다수는 이미 어려서부터 한 가지 이념으로 세뇌하듯 길들여졌다. 의심스러운 일, 납득되지 않는 일들을 보면서도 스스로를 그 이념의 틀에 맞춰 사고하도록 교육받았기에 그 틀을 벗어난 사고방식을 만나면 매우 당황하고 거북스럽다.

이런 국민들을 대상으로 지금 창조니 창의니 4차 산업혁명이니 읊어대고 있다. 그리고 그 틀을 강고히 하는 것이 ‘자유’라고 역설하는 힘센 노년층들과 뭔지 모를 옥죄임에 버둥거리는 젊은 층이 서로 이해할 수 없다고 외면하며 공존하고 있다.

북한과의 상대성만을 생각할 뿐 ‘자유’의 보편성은 무시하면서. 자유로운 사유 없이 창조도 창의력도 발현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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