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세계경제 빅뱅 이끌 新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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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도 밀월 이정표 ‘나투라 고개’ 44년만 부활
냉엄한 자연환경으로 둘러싸인 생활의 터전이자 북쪽 초원의 유목민족과 남쪽 오아시스 중심의 농경민족이 끊임없이 각축을 벌인 무대였던 실크로드! 서방으로부터는 보석과 옥, 직물 등의 산물이나 불교·이슬람교가 이 길을 통해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역사속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던 고대 실크로드가 이제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 저 멀리 인도를 넘어 중앙아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대동맥의 하나였던 ‘나투라 고개’가 극적으로 재개통된 것이다. 세계 속의 무서운 거인 중국과 인도간 협력의 이정표가 될 新실크로드 개통의 후속 파장들을 알아본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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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화와  인더스 문명’ 화려한 부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의 황화 문명과 인도의 인더스 문명의 유일한 육상 소통로이자 교역로였던 ‘나투라 고개’(Nathu la pass)가 44년 만에 극적으로 열렸다. 인도 시킴주의 강토크와  중국 티베트(西藏) 자치구의 경계인 야둥(亞東)을 잇는  해발 4,545m의 이 고개는 중국 라싸(拉薩)로부터 460km, 인도 콜카타부터는 550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내륙(內陸) 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 동서 통상로인 실크로드(Silk Road) 란 이름의 어원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F. Richthofen)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의 주요 거래품목이 비단인 것에 착안, 그의 著書 차이나(China)에서 '자이덴 슈트라쎄(Seiden strasse)' 라고 명명한 것에서 나왔다.

▲냉엄한 자연환경으로 둘러싸인 생활의 터전이자 북쪽 초원의 유목민족과 남쪽 오아시스 중심의 농경민족이 끊임없이 각축을 벌인 무대였던 실크로드! 당시 실크로드 동쪽 절반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주변의 강국들, 즉 서쪽의 이슬람, 북쪽의 투르크와 위구르, 남쪽의 티베트, 그리고 동쪽의 중국이 치열한 쟁탈전이 이어졌다. 이 나투라 고개는 과거 중국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대동맥의 하나였다. 역사적으로는 톈산(天山) 남로와 북로 등 실크로드와 연결되는 중국의 시안(西安)으로 이어지는 유서 깊은 교통로이다. 신라의 고승 혜초도 이 길을 통해 인도를 여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농업무역이 활발했으며 양국 교역의 80%를 담당하는 주요 무역로였던 나투라 고개는 1962년 중국과 인도의 국경 분쟁 이후 폐쇄돼 인적이 뚝 끊겼다. 그간 이 고개는 양쪽에 흩어진 티베트 유목민들이 서신 교환을 위해 1주일에 한 번 만나는 데 활용됐을 뿐이다. 양국은 2004년 재개통을 위한 외교각서 교환에 이어, 2005년 4월 정상회담에서 40여 년째 지속된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기로 하면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전략적 협력관계'를 체결하여 나투라를 재개통키로 합의했다. 드디어 중국과 인도 정부는 지난 6월 18일 중국 티베트(西藏) 자치구 라싸(拉薩)에서 회담을 갖고 이 통로를 다시 열어 무역을 재개한다는데 최종 합의했고, 이달 6일부터 양국의 육상 국경로인 나투라 고갯길을 통해 무역을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황화 문명과 인더스 문명의 소통로이자 실크로드(Silk Road) 교역의 중추였던 ‘나투라 고개가’ 44년 만에 다시 열렸다.

 
양국은 당초 2005년 10월 개통을 목표로 도로와 세관 등 기반시설 마련을 추진했으나 중국 측 공사가 지연되면서 개통 시기를 몇 차례 연기했었다.

중국은 국경 접경 지역인 야둥(亞東)에 국경무역 시장을 건설해 왔는데, 현재 5천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야동은 새 국경무역 거점으로 성장할 것이 확실시된다. 또한 중국 측은 인도와 직접 상품을 거래할 수 있는 둥칭강 교역시장을 개설키로 했다.

나투라 고갯길로부터 16㎞ 떨어진 산길의 면적 6천400㎡ 부지에 조성되며, 일주일에 두 번씩 하루 4시간 동안 열리게 된다. 나투라 통로를 통해 인도는 농산물과 철광석, 가축류 가공제품 등 29개 품목을 중국은 가전제품과 비단, 양모, 허브 등 15개 품목을 거래한다.

 
▽ 중국과 인도 新協力 '혁신적 이정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지난 4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인도는 최근 경제 성장마저 괄목할 진전을 보이고 있어 상호 협력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특히 금번 국경로 재개통은 양국 간 동반 발전의 획기적 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62년 중국과 인도의 국경 분쟁 이후 2005년 4월 양국은 정상회담에서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기로 극적 합의했다. 나트라의 개방이 현대판 실크로드의 시작이라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 지역에 매장된 막대한 양의 천연가스와 석탄 원유 등을 개발할 수 있고 브라마푸트라 강의 수력발전이 현실화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낙후된 중국 남서부 지역과 인도 북동부 지역 개발이 탄력을 받게 되어 중국 제1의 빈곤지역인 티베트의 경제 활성화에도 일조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나투라 재개통에 있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고 있다. 상하이와 콜카타를 잇는 해상 운송비용 절감으로 인한 양국 간 무역 활성화뿐만 아니라 남아시아 진출의 발판으로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인도 ‘시킴주 당국’ 역시 인도 서쪽 지역까지 이어지는 2차선 고속도로 건설의 승인을 중앙 정부로부터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 도로 건설에는 5억 달러 정도의 예산 확보가 필요하다. 중국은 이 도로를 이용할 경우 상하이(上海)와 콜카타를 잇는 해상 물류비용을 20% 이상 급감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7월 1일 개통한 칭짱(靑藏)철도를 야둥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해발 4545m의 나투라 고개는 과거 중국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 대동맥의 하나였다.
이제 중국은 칭하이(靑海)와 시짱(西藏-티베트)을 잇는 칭짱철도의 개통을 계기로 남아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원대한 꿈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칭짱철도는 남아시아를 동서로 관통한다는 '남아대륙교(南亞大陸橋)' 구축의 중요한 기초가 될 전망이다.

중국은 남아대륙교의 구축의 출발점인 칭짱철도를 민족단결의 길, 경제발전의길, 대외개방의 길, 국제협력의 길로 삼겠다는 구상이어서 향후 중국과 남아시아 국가 간 경협에 혁명적 일대 전기의 도래를 실감케 하고 있다.

남아대륙교는 상하이(上海)를 출발, 시안(西安)-란저우(蘭州)-시닝(西寧)-라싸(拉薩) 등 중국 내륙을 횡단한 다음에 네팔의 타투바니-카트만두-비르간즈를 거친다. 이어 인도의 파트나-뉴델리-뭄바이로 연결되며, 인도에 도달한 철도는 다시 파키스탄의 카라치로 연결된다.

중국은 남아대륙교를 통해 인도와 경협을 크게 늘리는 한편, 中央아시아와 西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국가 사이 공간적 심리적 거리를 밀착시킴으로써 이들 지역 간의 무역활성화를 크게 촉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 국경 분쟁의 악몽을 깨끗이 씻다

인간의 진입을 극력 가로막아온 히말라야 산맥이 없었더라면 중국과 인도는 전면적 혈전을 수 도 없이 치렀을 것이다. 중국은 자국이 점령하고 인도가 영유권을 주장하는 악사이 친(인도의 서북국경지역 라다크)에 1956년 3월에서 1957년 10월에 걸쳐 신강과 티베트를 연결하는 고속도로(新疆公路)를 건설하였다.

▲인도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 은신처를 제공한 것에 중국은 내정 간섭으로 규정하여 양국간 분쟁의 시발로 작용한다. 1959년 3월 티베트 라싸에서 중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자 인도가 군대를 지원하고, 달라이 라마에게 은신처를 제공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됐다. 양측의 첫 교전은 1959년 8월 동부 국경지역의 롱주(Longju)에서 발생하였는데, 중국군은 이곳 인도 초소를 점령하였다. 제2차 충돌은 1959년 10월 서북국경(라다크)의 콩카협곡에서 중국군의 동태를 탐지하던 정찰대와 중국군 간 총격전으로 인도 측에서 다수의 사망자 및 포로가 발생하였다. 이후 인도는 1961년 12월까지 서부국경지역에 약 50개의 국경초소를 설치하는 등 국경지역에서의 긴장수위가 더욱 고조되었다. 중국은 1962년 10월 20일 군사행동을 재개시하였다. 중국은 동년 11월 18일에 제2차 공격을 감행하여 인도 측에 3천여 명의 사망피해를 입히고, 약 4천명의 포로를 생포하였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양국간 교전은 치열하였다.

 
일사천리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한 중국은 일방적 철수를 결정하였고, 인도군 전쟁포로와 군수물자를 조건 없이 인도 측에 인도함으로써 중국의 관대함과 평화적 이미지를 과시하였다.

양측은 동서 냉전이 종식된 1989년부터 국경회담을 재개하게 된다.이후 양측은 1993년 9월 국경평화협정을 체결하기로 동의하였고, 1995년에는 8월 양측 국경병력 철수에 합의하였다. 특히 국가 수반으로서는 최초로 1996년 11월 강택민 국가 주석이 인도를 방문하여 국경문제 및 신뢰구축 4개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상호 우호 증진에 불씨를 세차게 지피었다.

▲중국은 일방적 승리를 거두고 휴전을 선언하였다. 이제 두 나라는 구악(舊惡)을 뒤로 멀리하고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다. 양국 국경 3500㎞ 가운데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으나 그간 시킴 주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해온 중국은 1975년 인도에 부당하게 병합된 히말라야 왕국으로 간주하지 않으면서 인도 땅으로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인도 역시 1959년부터 시작된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 ‘달라이 라마’의 ‘다람살라’ 거주를 계속 허용하는 대신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자국 거주 티베트 망명자들의 反중국 활동에 제약을 가하겠다고 공언한터여서 더 이상의 갈등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 '친디아'(CHINDIA)가 달려온다 전 세계 각 분야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구촌의 현안 및 과제를 고민하는 세계경제포럼연례회의 일명 다보스 포럼이 올 1월 25일 스위스 휴양도시 다보스에서 개막됐다.
▲일명 '친디아'로 통칭되는 인도와 중국이 동반자적 협력에 올인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과 인도의 막강한 경제력을 상징하는 ‘친디아’가 다보스의 최대 화두로 떠올랐는바, 약 300개의 워크숍과 세미나에서 중국 관련이 14개, 인도는 12개나 차지해 이들 나라의 국제사회의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였다.

2003년 미 금융투자 골드만삭스는 '21세기는  2000년대를 전후해 초고속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브라질과 러시아, 인도와 중국 등 신흥경제 4국을 일컫는 브릭스(BRICS)의 세기가 될 것 '이라고 예언하면서 이 네 나라 가운데 중심국가로 중국과 인도 두 나라를 꼽았다. 이제 이 둘 국가에는 ‘친디아’(CHINDIA)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친디아’라는 신생어는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05년도 세계경제 전망한 ‘2005 세계 대전망’(The World in 2005)에서 첫 사용한 용어로 중국(CHINA) 의 앞 글자와 인도(India)의 뒷 글자를 합성한 것이다.

대다수 예측기관들은  21세기세계 경제의 지각변동을 일으킬 진원지로서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세계 경제를 이끌 선도그룹으로 ‘친디아’를 꼽는데 일체 주저하지 않고 있다.

세계 인구 제1, 제2위의 대국으로서 세계 인구의 약 40%(23억명)를 차지하는 두 나라의 협력은 세계 정치·경제에 혁신적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지난 10여년 사이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9.5%, 인도는 7%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1970년대 중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의 20분의 1, 인도는 30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4년 현재 중국의 GDP는 미국의 16%인 1조6480억 달러로 급상승했고, 인도는 6%대인 5,888억 달러를 기록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듯 세계 유수의 제조업 회사들의 경연장이다. 이대로라면 중국은 2050년께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경제 강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중국과 인도가 연합하면 미국을 능가하는 시기는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미국의 폴 케네디 교수는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를 흔들거리게 할 위협 세력으로 중국과 인도를 꼽았다. 2050년 '친디아(Chindia)'의 경제력을 합치면 미국과 일본을 합한 것의 1.7배가 된다는 것이다. 친디아가 단일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는 지리적ㆍ경제적 조건을 모두 구비하고 있어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인도는 소프트웨어와 IT기술인력 수준이 세계 최고이다.
중국과 인도를 ‘친디아’라는 한 단어로 묶으면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하고 있는 것은 두 나라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두 나라가 인접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공히 모두 인구가 10억 명이 넘는 대국이라는 점이다. 셋째는 1970~1980년대까지 폐쇄적인 경제 체제를 유지하다 개방 체제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양국은 어떻게 공존 공생의 틀을 모색해갈 것인가? 해답은 쉽게 도출된다. 중국은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의 공장이며, 인도는 소프트웨어와 IT기술인력 수준이 세계 최고이다. 결론인즉  이러하다.

중국은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듯 두드러진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고, 인도는 제조업 분야에서 낙후되어 있으나 소프트웨어를 비롯한 최첨단 정보기술(IT)에선 두드러지게 강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제조업과 인도의 IT가 결합할 경우 이들 두 국가를 필적할 수 없다는 것에 세계 각국이 질시와 우려를 동시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인도는 에너지 수요 급증에 대응해 각종 석유개발권을 둘러싼 입찰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다.


석유 수요의 3분의 2 이상을 해외에서 조달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중국과 인도는 고속성장에 따른 에너지 수요 급증에 대응하여 에너지를 확보하는 방안 역시 공동 모색하고 있다.  이들 두 나라는 세계에너지 수요 증가의 35%를 차지한다.

2005년 12월 인도의 국영 석유천연가스공사(ONGC)와 중국의 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CNPC)가 사상 첫 국제입찰에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시리아 석유업체 알 푸라트 석유공사(AFPC)의 지분 37%를 공동 인수한 바 있다. 두 나라는 아프리카 수단과 카자흐스탄에서 에너지 개발 사업에 공동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두 나라가 선의적으로 경쟁하면서 상호 보완할 수 있는 협업체제를 구축할 경우 ‘친디아’가 세계 경제에 미칠 메가톤급 영향력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할 것이다.

<인터넷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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