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빚과 족쇄
역사의 빚과 족쇄
  • 홍승희
  • 승인 2005.01.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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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청구권협정 공개문서를 보며

40년 동안 소문으로만, 혹은 추측으로만 얘기되던 한일회담의 추악한 일면이 드러났다. 비록 총 162건이나 되는 한일수교협정 문서 가운데 불과 5권 분량의 한일청구권협정 관련 문서철만 공개됐지만 그 파장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인다. 당시 한일회담을 서두른 박정희 정권을 정치적 뿌리로 하는 현재의 한나라당과 박근혜 총재로서는 정치적 불똥이 튀는 것을 경계하는 게 자연스럽겠고 과거사 청산문제로 그간 팽팽하게 맞서왔던 국회에서 여야의 힘겨루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 정부가 꿀꺽 삼켜버린 개인 보상금을 뒤늦게 처리해줘야 할 재정경제부는 자다가 홍두깨로 맞는 꼴이지만 피해갈 사안이 아니다. 게다가 정부간 개인간 모든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아무리 강변해도 당사자들이 그리 호락호락 넘어가지는 않을 기세이니 외교부 또한 예상되는 후폭풍에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외교기밀문서 공개시한을 넘기고도 한일간 외교상의 문제를 들먹이며 공개를 거부해온 한일수교협정 문서 가운데 극히 일부인 한일청구권협정 관련 문서철 5권이 지난 17일 드디어 공개됐다. 이 마저도 일제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끈질긴 요구가 이끌어낸 결과일 뿐 역대 정부 누구도 들춰지기를 원치 않았던 추악한 외교문서요 우리 현대사의 낯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공개된 문서에 보면 경제개발계획 추진 자금 확보에 혈안이 됐던 5.16 세력들로서는 차후 번거로운 문제가 생길 여지를 아예 봉쇄하고 목돈만 챙길 욕심에 스스로 앞장서서 청구권 소멸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이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는지, 혹은 나중의 외교문제 발생을 방지하자는 차원에서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개인관계 청구권에 내재돼 있을지도 모를 문제점을 조사 중이라고 밝히자 조급해진 한국 정부가 먼저 개인청구권 소멸을 기정사실화시킨 것이다. 이 부분이 오늘날 문서상 보상 대상에도 들지 못한 정신대 피해자 등의 보상요구에 대해 일본 정부가 한일청구권협정을 들먹이며 모든 권리 소멸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물론 회담 막판까지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보상 아닌 경제협력이라고 주장했던 일본 정부가 이제와서 모든 보상이 소멸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타당성이 결여된 태도다. 이런 일본 정부의 모순된 태도는 피해자들이 재차 외교적 수단 강구를 한국 정부에 요구하고 나서는 배경이 되고 있다.
되돌아 기억을 떠올려 보면 해방정국에서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적산 불하가 엄청난 경제적 특혜를 몰아주며 신흥부자를 만들어냈듯이 대일청구권 자금은 박정희 정권 막바지까지 해당기업들에게 엄청난 특혜를 제공하며 기업과 기업인들을 길들여갔다.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 배분이 훗날 IMF체제하에서 공적자금 새나가던 것보다 더 헤프게 이루어졌다. 변변찮은 금액을 피해자 개인 몫이라고 받아서 정권 입맛대로 조자룡 헌 칼 쓰듯 마구 휘둘러 써
버린 것이다.
당시 군사구테타 세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그 대단했던 굴욕외교 반대시위를 가볍게 묵살하고 강행한 한일수교협정에서 한국정부가 최대 역점을 둔 분야는 청구권협정이었고 그 보상금액만이 관심사였었음이 이번 공개문서에서 분명히 드러나 보인다.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관심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40년이 지난 이제라도 정부는 개인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금 지급에 적극 나서야 옳다. 당시의 생존자 가운데서도 이미 상당수는 사망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후손들에게라도 보상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 국민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기 보다는 대접도 못받으면서 못난 부모 돌보는 효자`효녀처럼 나라 지키기에 피땀 흘려왔다. 이제 국가가 그 몫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자면 지나간 정부가 진 역사의 빚일망정 청산해야 한다. 그래야 과거 정부가 우리 역사에 채운 족쇄를 풀 길도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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