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정경유착', 그 유구한 카르텔을 깨는 방법
[데스크 칼럼] '정경유착', 그 유구한 카르텔을 깨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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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 14일. 국회 5공비리 조사특위는 전두환 일파가 일해재단을 설립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을 통해 대기업으로부터 퇴임 후 쓸 자금을 거둬들였다는 사실 증명을 위해 청문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고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등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출석했다. 당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특위위원으로 일해재단의 모금비리와 관련해 질문하자, 고 정 명예회장은 “시류에 따라 편히 살려고 돈을 냈다", "기업이 권력 앞에서 왜 만용을 부리겠나"라고 답변했다. 

그로부터 28년이 흐른 2016년 12월 6일. 국정농단 사건 관련 국회 '최순실 게이트' 1차 청문회에 또다시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불려나갔다. 최순실이 주도해 설립한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에 대기업들이 역시 전경련을 통해 불법 자금을 건넸기 때문이었다. 청문회 자리에는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허창수 GS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9명의 총수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당시 청문회에서 왜 재단에 돈을 줬냐는 질의에 허 회장은 "청와대 요청을 기업이 거절하기는 참 힘들다"고 답했다. 이 부회장은 "지원하면서 대가를 바란 적이 없지만, 앞으로 전경련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언제나 그랬듯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좌지우지해왔다.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뒤흔든 사례는 역사적으로 찾을 수 없다. 정치와 경제의 유착 관계는 시장이 생겨난 봉건사회부터 줄곧 이어져온 그야말로 유구한 카르텔이다. 아무리 경제가 정치를 떼어내려 해도, 정치가 곧 경제를 흔들 수 있는 막강한 상위 권력주체이기 때문이다. 

고 양정모 회장의 국제그룹은 전두환 정권에 돈을 적게 냈다가 1985년 공중 분해됐다. 2011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현 정부의 경제성적표는 몇 점이냐”는 기자 질문에 “낙제점을 줘서는 안 되겠지요”라고 답했다가, 삼성전자·삼성물산 등 주요 계열사가 세무조사를 당해 수천 억원의 추징금을 물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이미경 CJ 부회장은 좌파 성향 영화를 만들었다는 정권의 압박에 결국 미국으로 쫓겨갔다. 정치권력이 검찰,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을 앞세워 칼을 휘두르는 데 이에 맞설 기업은 없다. 

최근 전경련에 4대 그룹의 재가입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 말들이 많다. 2016년 국정농단 사건에 휘말린 삼성, LG, SK, 현대차 그룹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며 전경련을 탈퇴했다. 

4대 그룹이 재가입을 주저한 가장 큰 이유는 ‘정경유착’의 꼬리표를 전경련이 아직 떼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치권력과 경제계가 건전한 상호 견제와 비판의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경제계가 정치의 시녀 역할을 하면서 전경련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결국 전경련은 ‘한국경제인협회’라는 단체로 전환하면서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게 됐다. 

‘정경유착’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진 단체에 기업들이 대놓고 떳떳하게 재가입하기는 어려웠을 게다. 실상은 이미 정치와 경제가 끈끈하게 맺어진, 어쩔 수 없는 유착 관계라는 걸 다 알면서도 국민 보기 민망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로 출범하는 한국경제인협회는 국내 재계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 보다는, 갈수록 규제와 자국 경제 우선주의로 선회하고 있는 세계 시장에서 목소리를 키우는 데 더 집중해야 한다. 세계 경제 흐름을 먼저 읽고, 국내 산업계와 정부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제 싱크탱크 역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권력이 스스로 밀실에서 재계 검은 유착을 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이 어디 그렇던가. 그래서 정경유착을 막으려면 모든 절차를 투명하게 해야 하고, 정보 공개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또 언론을 비롯해 시민단체, 나아가 국민이 철저히 감시하는 것 외에 달리 묘책은 없어 보인다.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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