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스 이도경 기자] 최근 '페미니즘'을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러스트레이터 등 자사 직원을 해고하는 게임업계 관행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달 25일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에 참여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가 과거 SNS에 페미니즘 관련 게시글을 리트윗했다며 이용자로부터 항의를 받자, 게임 제작사가 해당 일러스트레이터를 해고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됐다.
이용자들은 이 일러스트레이터가 지난 2018년 n번방 사건과 관련 '불법 촬영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SNS 게시글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남성 혐오' 행위라고 주장했다. 해당 게시글은 이미 삭제돼 캐시(임시 저장소) 상태로만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림버스 컴퍼니의 제작사 '프로젝트 문'은 논란 발생 후 3시간 여 만에 이용자 불만 사항을 수정하겠다는 공지와 함께 이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와의 근로 계약을 종료했다고 밝혔다.
이후 더 큰 논란이 일자 프로젝트문 측은 이 여성 노동자에 해고 통보를 하지 않았다며 사상 검증과 부당 해고가 아니라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이 직원의 계약이 종료될 예정이라는 안내문은 내려가지 않았다.
게임업계 노동자가 일종의 '사상 검증'과 함께 부당한 처우를 받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16년 넥슨은 이용자 반발에 '왕자는 필요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를 입고 인증 사진을 올린 김자연 성우를 자사 게임 '클로저스' 성우진에서 퇴출했다. 지난 2018년에는 '소녀전선', '소울워커', '벽람항로' 등의 게임에서 일러스트레이터 '페미 의혹'이 제기돼 캐릭터와 일러스트가 교체되기도 했다.
전국여성노동조합에 따르면 지난 2016년 이후 게임업계 내 여성 인권과 관련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은 여성 노동자는 최소 14명에 달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020년 여성 일러스트레이터 혹은 웹툰 작가가 페미니즘 이슈에 동조했다는 이유만으로 업계서 퇴출되는 사건과 관련해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문화체육관광부에 제기하기도 했다.
동시에 인권위는 문체부를 향해 게임업계 내 여성혐오·차별에 관한 실태 조사를 요구했으나, 현재까지 제대로 된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시 인권위가 개선을 요구한 문제가 2023년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다.
게임업계도 할 말은 있다. 게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작은 흠이라도 잡히면 남성 중심의 게임 이용자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은 물론 심할 경우 게임을 '보이콧'(조직적 거부운동)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젠더 이슈가 발생할 때, 이용자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회사가 존폐 위기까지 가는 경우가 있다"며 "규모가 작은 중소 업체의 경우 타격은 더 크다"고 말했다.
게임사들이 '여성주의'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자사 직원을 해고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하는 것도 문제지만, 일부 게임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스트' 직원을 색출하고 그들에게 낙인을 찍는 것이 일종의 놀이 문화와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는 점은 더더욱 우려된다.
지난 2020년 카카오게임즈는 자사 게임 '가디언 테일즈'에 등장하는 '걸레 같은 X'이라는 문장이 12세 이용가 게임에서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고 해당 문장의 '걸레'를 '광대'로 수정했다.
이에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광대'가 남성 혐오적 표현이라며 비난하기 시작했고, '광대'라는 남성 혐오적 용어를 찾을 수 없음에도 게임사로부터 직접 사과를 받기 까지 멈추지 않았다. 게임사가 여성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반대편'에 섰다는 일종의 논리 비약인 것이다.
또 이들은 엄지와 검지를 모으는 손동작이 '성기가 작다'라는 의미라며, 이와 조금이라도 유사한 일러스트를 뒤지며 비난에 나서기도 했다. 없던 논란을 억지로 찾아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자 하는 '창조 논란'의 대표적인 예다.
물론 모든 게이머들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이크를 쥐고 있는 일부 커뮤니티의 목소리가 게이머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실존하는 노동자의 생계와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프로젝트 문'의 노동자를 해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커뮤니티에서는 자신들이 '승리'를 이뤘다는 자기만족과 함께 해고 노동자를 향한 비난과 성적 희롱이 쏟아지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소비자 목소리를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이같은 불만이 '합리적'인지, 게임사로서 지켜야 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