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게임업계, 주 최대 69시간 근로 추진에 "과로사 재현될 것"
IT·게임업계, 주 최대 69시간 근로 추진에 "과로사 재현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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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업계 종사자들 "과거 크런치 모드(비상근무) 체제와 다름없어"
"노조 없는 중소 IT·게임 근로자들, 노동환경 악화···노동 양극화 우려"
판교 테크노벨리. (사진=판교 테크노벨리 홈페이지)
경기도 판교 테크노밸리의 밤 풍경. (사진=판교 테크노벨리 홈페이지)

[서울파이낸스 이도경 기자] 정부가 주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근로시간 개편안을 추진하자 IT·게임 업계 노동자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관련 업계 노동자들은 현재 주 52시간 제도 아래서도 과도한 야근에 시달리는데, 근무 허용시간이 늘어날 경우 과거 '크런치모드(비상 근무 체계)'로 인한 노동자 과로사 문제가 되풀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8일 업계에 따르면 고용노동부 등 관계 부처는 지난 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를 통해 '주 52시간 근무제'를 포함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을 추진하기로 했다.

개편안은 일이 몰려 바쁜 경우 최대 연장 근로시간을 기존 주 52시간에서 69시간으로 늘리는 한편 바쁘지 않을 때 장기 휴가를 몰아 쓸 수 있도록 근로 시간을 유연화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근로자에 주 4일제, 안식월, 출퇴근제 등 다양한 근로시간 제도를 향유하는 편익을 안겨주고, 기업에는 인력 운용의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연장 근로시간을 관리해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하기 위함일 뿐 근로시간 자체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IT와 게임 업계 근로자들은 주 52시간보다 근무 시간이 더 늘어나게 되면 지난 2017년 대형 게임사 사망자를 불러온 '크런치 모드'가 재현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당시 근로복지공단은 크런치 모드로 숨진 모 대형 게임사 자회사의 20대 게임 개발자 A씨에 대해 업무상 재해 사망을 인정했다. 당시 A씨는 사망 전 12주에 걸쳐 불규칙한 야근과 초과 근무를 지속한 결과 급성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에 따라 대형 게심사 측은 '장시간 근로개선안'을 발표하고 야근과 주말근무를 금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지난 2018년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주 52시간제가 정착되고 난 이후, IT·게임 업계의 근로 환경이 크게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발간한 '2021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 2021년 기준 국내 게임사의 근로 시간은 주당 평균 41.3시간으로 2년 새 약 5시간 줄었다. 크런치 모드 경험자 비율 역시 60.6%에서 15.4%로 크게 감소했다.

서승윤 카카오 노조 지회장은 "현재 추진되는 개편안은 과거 크런치 모드와 유사한 형태로, 이를 겪은 많은 노동자들이 건강 문제를 호소하고 있는 반면 소득에는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며 "업계에 몸 담은 노동자 중 이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종사자들은 더 나아가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이 결국 노동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조를 보유한 소수 대기업은 사측이 제시하는 무리한 노동 요구에 대한 거부권이 있지만, 노조가 없고 포괄임금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중소 IT·게임업체 종사자들의 경우 '공짜 야근' 등 현재보다 더욱 악화한 노동환경에 내몰릴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노동시간 유연화에 앞서 포괄임금제 폐지를 먼저 단행해야 하고, 초과근무나 야근에 대한 합리적 보상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며 "사업자 입장에서도 단순히 노동의 양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주 최대 69시간 근무제가 도입되면 휴식을 보장받기 어려울 것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연차 휴가도 눈치를 보며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에 장기 휴가를 쓰기는 사실상 힘들다는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최근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크런치 모드를 경험한 종사자 중 크런치 모드 후 휴식이 보장된다는 응답은 전체 54.1%였다. 약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크런치 모드 후에도 휴식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휴식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고 에 응답한 비율도 전체의 7.0%로 나왔다.

IT 분야 근로자들 역시 공개 반발했다. IT노조는 지난 7일 성명문을 통해 "주 69시간제는 노동자의 건강과 목숨을 끊어지면 단지 새 것으로 바꾸면 그만인 고무줄처럼 마구 잡아당겨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과거로의 퇴행"이라며 "일이 많을 땐 연장 근무와 휴일 근무까지 하고, 쉴 때는 길게 쉰다고 하는 것은 기계를 돌릴 때나 쓸 수 있는 말"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정부는 내달 17일까지 입법 예고를 거쳐 오는 6~7월 근로기준법 등 관련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다만 더불어민주당 등 거대 야당이 개편안에 반대하고 있는 만큼 해당 법안이 국회 통과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로 남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8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의 근무시간 개정안에 대해 "지금도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산재사망 사고율도 최고 수준인데, 정부 계획대로 노동시간을 연장하면 국민에 과로사를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며 "사용자와 갑·을 관계인 노동자 입장에서 정기휴가 활성화 같은 방안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탁상공론"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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