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종의 세상보기] 사법부가 존재하는 까닭
[김무종의 세상보기] 사법부가 존재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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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판단과 양심에 근거해…” 판사를 생각하면 떠오는 구절이다. 영화 ‘더 포스터’는 미국 닉슨 전 대통령이 언론사에 보도 금지압력을 행사한 데 대해 대법원이 닉슨 정부의 결정이 잘못됐음을 알린다. 베트남전 비위에 대해 펜타곤 문서를 폭로해 정부를 비판하자 뉴욕타임스는 보도를 금지하는 판결을 받게 되고, 워싱턴포스트가 관련 보도를 이어간다. 하위 법원이 이에 대해 각기 다른 판결을 내리자 연방대법원은 두 신문사의 사건을 병합 심리해 최종적으로 언론의 자유에 손을 들어준다.

판결의 요지는 ‘언론은 지도층(정부)이 아닌 국민의 입장에서 판단해야 하며(The press was to serve the governed, not the governors)’ 이에 대해 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정부에 반하는 보도를 해 증시 상장을 한지 얼마 안된 터라 투자자와의 계약 위반 등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은 편집국 기자들과 함께 오히려 보도 강행 의지를 보여준다. 언론의 결단과 힘을 보여준 사례였지만 그 언론에 더 힘을 실어 준 것은 법원의 판단에 있었다. 국민 입장에서 생각하는 판단이었다.

과거 유신 정권에서는 국민이 아닌 정권 입맛에 맞춘 소신 없는 판결이 횡행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양심과 법적 소신을 굽히지 않은 판사들도 있었다.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영화를 누리지 못했지만, 이영구 판사는 지금 세태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 판사는 서울지법 영등포지원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1976년 서울대에서 독재반대 시위를 한 '5·22 사건'의 주역 2명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해 석방했다. 또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기소된 교사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날조했거나 왜곡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피고인 221명에 대한 선고 중 유일한 무죄로 이듬해 1월 그는 결국 지방으로 좌천되고 법복을 벗었다. 서슬퍼런 당시 그의 판결은 불의에 저항하고 국민 편에 있고자 하는 이들에게 한줄기 희망이었다.

지금 우리의 사법부는 어떠한가. 일부 때문에 전부를 매도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사법부 정점에 있는 수뇌의 생각과 행동거지가 썩었다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는 심각한 상황이다. 더욱이 사법부는 국민의 선택을 받은 집단도 아니기에 스스로 자정을 통해 국민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입법·행정과 함께 삼권분립을 위해 속성상 스스로 자제해야 할 덕목을 요구받는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들이 입장할 때 집행관(marshal)은 얘기한다. “존경하는 대법원장님과 대법관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정숙, 정숙하고 또 정숙하십시오(The Honorable, the Chief Justice and the Associate Justices of the 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 Oyez! Oyez! Oyez!).” 대법관에 대한 존경심은 그들이 판단한 수많은 선례에 국민들이 신뢰를 보내는 분위기다. 미국의 일반 판사는 ‘저지’(Judge)이지만, 연방 대법관은 오직 정의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에서 ‘저스티스’(Justice·정의)라고 한다.

1974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닉슨 대통령에게 워터게이트 비밀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는데 9명 가운데 4명이 닉슨이 임명한 대법관이었다. 진보와 보수 성향을 떠나 대법관 임명 후 정파를 뛰어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우린 대법관을 존경할 수 있을까. 적어도 현재 상황에서는 어려워 보인다. 재판거래 의혹과 법관 사찰 등에 대해 명백한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는 한 국민 불신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급기야 대법원장의 출근 차량에 70대 노인이 화염병 테러를 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어느 누구도 국민 위에 설 수 없다. 더구나 사법부는 선출직이 아니라는 근본적인 취약점이 있기에 스스로 자정하고 정의를 세우지 않으면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국민의 신뢰가 있을 때 사법부의 존립이 가능하다. 사법부 개혁은 권력이 아닌 ‘국민을 위한 정의 실현’을 최우선 가치로 하는, 스스로가 감당해야할 자신들의 몫이다. 물론 사법부 만의 일은 아니지만.

김무종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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