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역사의 반복성
[홍승희 칼럼] 역사의 반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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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마당에 들어서면 큼지막한 비석들이 줄지어 서있다. 조선시대 고위층들의 비석이다. 그 중엔 왕족도 있고 고위 양반들의 것도 있다.

그 비석의 비문들을 읽다보면 첫 대목에서부터 가슴이 턱 막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유명조선(有明朝鮮) 아무개라고 소개된다. , 명나라에 있는 조선의 아무개라는 거다.

평민들에겐 별 감흥 없었던, 오히려 성가신 강대국에 불과했던 명나라가 지배층들에겐 섬겨야 할 상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글귀가 새겨진 비석들의 연대를 보면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오히려 더 두드러졌던 게 아닌가 싶다.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들이 사대(事大)를 기치로 내세울 때 과연 후손들의 그런 비굴함까지 염두에 뒀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긴다는 사대주의가 영원한 굴종을 다짐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주자학을 학문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종교로 신앙하며 역사의 역동성을 아예 짓밟고 기득권에 목매단 조선의 기득권층들에겐 한번 주인은 영원한 주인이라는 노예의 각인이 새겨졌던 게 아닌가 싶다.

중원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약자가 강해지면 지배권이 바뀌는 역동성으로 인해 크고 작은 세력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중원에서의 역사가 한 왕조가 3백년을 넘지 못하며 격동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의 선조들은 나라를 키우는 것보다 왕권의 안정을 위해 안으로만 쭈그러든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 시작을 연 이성계의 조선은 고려가 황제국이었음을 건방진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수많은 역사서들이 참서라는 명목으로 불태워지고 행여 왕실의 수거에 저항해 서책을 감추었다가는 참형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조선 말기까지도 그런 책들이 간간히 시중에 전해지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일본제국주의는 다시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일제 수거령을 내리고 수많은 서책들을 불살랐을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어쨌든 변화를 가로막기에 급급하다 계속 쪼그라들었다. 그런 슬픈 역사적 경험은 아직도 이 나라 정치인들에게 비겁한 DNA로 물려진 것이 아닌가 싶다.

남북정상회담이 예상 밖의 성과를 내자 일반 국민들은 너나없이 새로운 희망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그런 국민들의 희망을 보지 못하고 남북화해 노력에 여전히 종북, 빨갱이 등의 단어들을 들이대기에 여념없는 정치인들이 숫자에 관계없이 큰 소리를 낸다.

공격의 포인트가 계속 오락가락 하긴 하지만 그들은 남북이 평화체제로 들어가면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될까봐 지레 걱정한다. 물론 평화체제가 갖춰지면 주한미군의 위상에 대한 논의는 일겠지만 그렇다고 중국을 잠정적 적으로 보고 훈련하는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리 없다.

오히려 우리로서는 주한미군 주둔비용을 우리한테 몽땅 뒤집어씌우고 싶어 하는 미국에 대해 좀 더 유리한 입지에서 협상할 여지가 생길 뿐이다. 통일이 된다 해도 주한미군이 철수할 가능성이 희박한데 겨우 남북한 간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것만으로 미군이 물러갈 것이라는 생각을 어찌해서 그토록 절절하게 하는 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아직도 여전히 종북이니 빨갱이니 주사파니 하고 있는 고위 정치인들을 보면 안쓰러움마저 느끼게 된다. 멸망한 명나라를 여전히 상국으로 섬기며 사대의 예를 다하고자 했던 조선의 지배층과 같은 의식의 궤도에 올라있는 것만 같다. ‘변화는 무조건 위험하다는 발상이 조선의 문명조차 후퇴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들이 학생운동권은 몽땅 주사파인줄 알도록 보수 정권들이 세뇌를 했지만 실상 학생운동권 중에도 주사파는 그 숫자가 극히 미미하다고 오래전 한 운동권 대부로부터 들었다. 당시 운동권에도 민족주의를 내세운 쪽과 노동자 해방을 내세운 쪽이 대립하고 있었고 그 중 민족통일에 우선을 뒀던 학생운동 세력 중 1% 미만이 북한의 주체사상이라는 것에 심취했다는 것이다. 물론 주체사상 유인물을 그들만 본 것은 아니겠지만 책을 봤다고 다 그 책의 주장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니까. 더구나 그 소수를 주사파로 만든 근본원인이 대미 사대에 열 올리는 지도층에게서 비롯됐을지도 모르는 데 목청 높여 괜한 사람들까지 주사파로 몰아버리는 일은 어느 모로 보나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를 하려면 역사를 먼저 생각하고 우민화 선동은 그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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