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 장남같은 은행산업
가난한 집 장남같은 은행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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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알아듣는 병증의 하나로 화병이라는 게 있다. 그 자체로 병증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건강하게 해소시키지 못하고 억눌려 있던 울화가 신체적 질환으로 발전하는 경우를 휘뚜루마뚜루 싸잡아 우리는 그리 부른다.

그런데 근래 들어 울화를 억누르기보다 종종 과격한 방법으로 풀어내는 이들이 는 탓에 애꿎게 곁에 있던 이들이 봉변을 당하거나 때로는 횡액을 맞기도 한다. 그들의 변명을 듣자하면 무언가 ‘분하고 억울한’ 일이 많다.

이번 미국 버지니아공대 참사를 저지른 조승희의 동영상을 보면서 많은 이들은 그가 한국 국적자이기는 하지만 사고방식이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라며 안도하는 듯했다. 그는 이미 한국어도 잊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선택하는 단어들도 한국적이지 않다.

그러나 ‘너 때문에...’라는 원망 가득한 그의 표정은 ‘분하고 억울한’ 게 많은 다수의 우리들 모습과 매우 닮았다. 대구 지하철 화재를 저지른 범인과도 정서적으로 닮아 보인다.
주변의 많고 많은 성인 남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면 그 어머니나 아내에게 한없는 어린애의 응석을 보인다. 허풍 떨고 큰소리는 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의존하려 든다. 세상사가 고단하면 할수록 마냥 억울하고 분해서 술에 절어 지내면서도 다 남 탓이다. 이건 한 꺼풀만 벗기고 나면 너무 흔히 볼 수 있는 이웃들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비단 개인들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집단적으로, 조직적으로 표출되는 각종 주장, 구호 등도 한 겹 벗고 보면 대개는 원망이고 응석이다. 물론 당당하게 주장할만한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억압이 사라지면서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한 각종 이익단체의 민원 가운데 대다수는 우리 사회의 미성숙 상태를 드러낸다.

그런 미성숙의 원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 양육단계에서의 과보호가 아닌가 싶다. 어린 아이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에 따른 책임 의식을 심어주기 보다 모든 걸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는 과보호가 평생 성숙하지 못한 인간을 길러낸다는 것은 상식이다. 모험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위험한 것은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기르며 두려움에 떨지 말라고 취업시험장까지 따라나서는 극성스러운 모성이 어찌 성숙한 자식을 길러 낼 수 있겠는가. 이런 현상은 사회적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요즘 금융권을 보고 있자면 그 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장손은 과보호하고 나머지 자식들에겐 마냥 억압적이거나 소홀한 전통적 가부장 집안을 보는 듯싶다. 정부 정책의 집행 창구로 오랜 기간 길들여졌던 상업은행들은 외환위기 이후 IMF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자립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러면서 정부 지분도 대부분 양도됐다.

그러나, 처갓집 돈에 팔려가 출세에 혈안이 된 장남을 여전히 내 품의 자식으로 착각하고 가슴앓이 하는 가난한 부모들처럼 정부는 여전히 은행을 향한 역할을 바꾸려하지 않는다. 증권사나 보험사는 그저 말만 잘 들으면 충분하고 은행은 어서 국제경쟁력을 기르도록 정부가 무언가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듯 안달이다.

장남 뒷바라지에 온 가족이 매달리며 희망을 삼던 옛 사람들도 그런 자식 효도 받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대개 과보호 받고 자란 장손들 중 상당수는 스스로 상황을 극복해 나갈 역량이 미처 길러지지 않은 채 저만 아는 자기중심적 인성을 드러내기 쉽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당시에도 가장 큰 지원을 받았던 은행이 임직원들에 대한 과도한 보수 지급 등으로 말이 날 때, 우리 느낌이 등 돌린 장남 바라보는 부모 심정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지난 일은 아무래도 좋다. 앞으로가 문제다.
이제 은행은 국내외 모든 금융회사들과 평등한 위치에서 전면적 경쟁을 벌여야 한다. 과연 정부 우대정책에 익숙한 은행이 덩치만 커졌다고 충분한 경쟁력이 있을까. 아직도 은행 고유업무라며 증권사로 보험사로 대고객 서비스가 확대되는 것에 딴지거는 은행을 보면 아직은 그다지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그게 다 자신감, 의연함이 아직 부족해 보여서다.
 
홍승희 <서울파이낸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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