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괴물의 탄생
[데스크 칼럼] 괴물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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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그는 유대인 학살 등 인류사에 있어서는 안될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인물의 등장이 민주주의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당시에도 선거는 존재했다. 독일에서 그는 초기에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지지 언론 등 세력을 등에 업고 점차 존재감을 넓혀 나간다. 결국 ‘선거’로 그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당선돼 독일 최고직 자리에 오른다.

1930년 9월 독일 총선에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이 사회민주당에 이어 원내 제2당이 됐을 때 히틀러는 당시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민에게서 모든 권력이 나온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일단 정권을 장악하자 히틀러는 독일 민주주의는 먼 얘기가 돼버린다.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권좌에 오른 후 3월 23일 입법권과 헌법 수정 권한을 의회에서 정부로 이양하는 '민족과 국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법', 일명 '수권법'(授權法)이 우파와 중도파의 찬성에 힘입어 의회를 통과한다. 이에 6월에는 나치당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되는데, 히틀러가 독일 민주주의를 완전히 박살내는 데 5개월도 걸리지 않은 셈이다.

보통 히틀러의 등장은 막대한 전쟁배상금 때문에 이에 지친 독일 국민이 그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그의 등장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회민주당이 지배적이었고 나치당은 공산당에 앞서 2위까지 가다 나중 1위 자리에 등극한다. 당시에도 좌파 우파가 있었고 지금과 다를 바 없다. 히틀러는 특히 공산당을 경멸했다.

독일 신학자 ‘마르팀 묄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히틀러의 더 큰 과오는 2차 세계대전(1939년 9월 1일~1945년 9월 2일)으로 수많은 인명 사상(5000만~8000만명)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끝까지 미루다 참전한 미국만 41만9400명이 사망했고(0.32%로 인구대비 가장 적은 비중) 러시아는 2660만명(13.7%)이나 된다.  

유럽 전역이 히틀러의 손아귀에 잡혀있을 때 영국 마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당대의 인물 처칠이 이를 저지하게 된다. 히틀러는 바로 공격대상을 러시아로 바꾸었으나 이 또한 쉽지 않았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그 역시 몰락의 비운을 맡게 된다.

히틀러가 집권후 자행된 상상 이상의 비 민주적 작태는 히틀러 집권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다.

곧 총선이다. 선거는 때론 민주주의를 빛나게 하기도 하지만 괴물을 만들고 시대를 퇴행케 한다. 인물 선택은 그리 어려운 일이다.

뽑아놓고 후회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정책과 비전, 인물됨됨이 등을 잘 살펴보자. 만인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괴물이 탄생해서는 안된다.

18세기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접경에 있던 사보이아 공국의 외교관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말로 맺음말을 대신한다. "모든 국민은 그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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