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권 발행을 보는 눈
고액권 발행을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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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재경부와의 협의를 거쳐 2009년 상반기 중 5만원, 10만원의 고액권 발행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최고 액면 금액인 1만원이 소득, 물가 등 현 경제상황에 비해 너무 낮아 경제적 비용과 국민 불편이 매우 크다는 것이 이유다. 고속성장을 거듭해온 사회다. 따라서 높은 물가상승률이 이어져왔고 화폐 가치는 그만큼 낮아졌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그동안 적잖이 거론돼온 리디노미네이션, 즉 화폐단위 변경 대신 고액권 발행으로 화폐개혁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다소 어정쩡한 결정처럼 보이지만 당분간 화폐단위 변경은 검토하지 않겠다고 한은 총재가 기자회견에서 확실히 못 박았다니 관련 논의도 한 동안은 수그러들겠다.

한국은행의 이번 결정은 화폐도안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올해 9~10월 중 도안을 확정하고 가급적 금년 중 행정절차도 모두 마치겠다는 등 일 진행에 대한 명확한 계획을 정한 후 발표하는 수순을 밟아 논란의 여지를 차단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과 재계가 원했던 방향이어서인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전문가들 사이에 다소의 반론이 있었다지만 신권 화폐 소동을 겪은 직후여서인지 일반 서민들의 관심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고액권 발행 결정에 대한 비판 주장 가운데는 듣기에 다소 진부한 구석이 보인다. 그건 괜한 걱정으로 보이서일 수도 있지만, 다른 여러 변수들에 대한 고려가 엿보이지 않는 데 따른 어설픔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예전부터 “걱정도 병”이란 말을 많이 사용해왔다. 적절한 염려와 걱정은 일의 안전한 진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무슨 일에나 그렇듯 도를 넘는 걱정은 늘 발목을 잡아 변화를 가로막고 나서기 일쑤다. 노파심이라고도 하는 이런 지나친 염려에 진취적 의욕이 꺾인 경험들이 많다보니 일을 추진하려는 이들은 내적 심리적 충돌이 일어났을 터이다.

어느 사회나 그렇듯 우리 사회의 많은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늘 수 많은 반대들이 발생한다. 그 중에는 물론 과도한 염려가 섞여 있고 더하여 고의적 위기의식 조장까지 등장해 사회적 진전을 가로막기도 한다.
그렇다고 또 딱히 어느 수준만이 알맞다는 정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암묵적인 사회 공동체의 동의가 적절히 모이는 정도에 따라 답을 찾아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답”이라고 고지식하게 우겨대는 '이념형' 인간들이 많은 사회는 그 답을 찾아내기가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이번 고액권 발행을 두고 나온 부작용 우려 몇 가지를 모아보면 첫째가 뇌물, 둘째가 탈세, 셋째가 인플레였다. 그런데, 그 하나 하나가 다 우려를 위한 우려는 아닌지 모르겠다.
그 동안에도 꼬리를 감추기 쉬운 현금을 뇌물로 사용하다보니 거액을 옮기는 데 눈가림용으로 사과상자가 등장해 ‘사과상자를 주고받았다’ 하면 뇌물이 오간 것으로 둔갑해버렸다. 사과농민들이 참 분통터질 일이다.
그 전에는 1만원권 가득 채우면 1억원이 들어간다는 007 가방을 주고받아 뭔가 스릴러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정치자금을 둘러싸고 차떼기니 뭐니 하는 말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고액권이 없어서 뇌물 액수가 적고 고액권이 생기면 뇌물 주고받기도 더 쉬워질 것이라는 발상은 참 순진해 보인다. 이미 공화당 시절부터도 초고액 정치자금들은 달러로 오고갔던 것으로 안다. 그래서 최고위층 모르게 오간 달러 베이스 정치자금들이 중앙정보부에 포착돼 사단이 나기도 했고. 지금은 글로벌시대, 개인의 외환 거래 규모도 크게 늘었고 환 투자가 가능한 사회다.

예로부터, 열사람이 한 도둑을 못 잡는다는 말이 있다. 고액권의 유무가 뇌물 주고받는 자나 탈세를 일삼는 이들에게 무슨 대단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건 너무 순진한 탓이고 변화가 싫어 반대한다면 그는 단지 수구주의자일 뿐이다.

홍승희 <서울파이낸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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