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문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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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의 탈당이 정치쇼크를 낳았다는 한 정치인의 입에서 ‘새로운 문명을 선도할 정치세력을 만드는 게 꿈’이라는 탈당의 변이 나와 흥미를 끈다. 개미굴에 비 들이친 듯 분주하게 줄지어 움직이는 작금의 정치판에는 각종 명분들이 난무한다. 손학규의 변명은 그 가운데 나름대로 산뜻한 맛이 느껴진다. 당사자의 진정한 속내까지야 왈가왈부할 게 못된다. 국가간의 전쟁에도 명분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명분 없어 하고 싶은 공격을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가.

어떻든 탈당에 따른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 한껏 몸을 낮추고 있는 그가 내놓을 수 있는 명분으로는 꽤 상품성이 있는 표현을 골랐다. 지금 손학규로서는 참 곤혹스러울 터이다. 분명히 그 때와는 다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손학규의 탈당을 보는 대중들은 자꾸 경선에 불복해 탈당했던 이인제를 떠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혹은 정치가에 대해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끌어다 붙이든 학문적으로 어떤 해석을 덧칠하든 근본적으로 정치란 명분을 제조하는 비즈니스다. 정치가 역시 명분제조기술자들이다.

그 정치가들의 명분을 구체화시키고 실천하는 것은 관료들의 몫이다. 선거는 그들이 내놓은 명분을 놓고 입맛대로 고르는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치가들이 내놓는 메뉴는 종종 무책임하다. 때로는 오랜 동안 인류가 꿈꿔온 추상적 미래를 메뉴로 선보일 때도 있다. 그 메뉴가 선택될 경우 결코 창조적 일꾼은 못되는 관료들로서는 제대로 요리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뒤죽박죽 이상한 퓨전요리가 되기도 한다. 현재의 참여 정부도 그런 경우로 봐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사 속에서 늘 정치가들이 번번히 명분을 만들어내 왔다. 정치조직이라는 매장에는 그 명분들을 늘어놓고 선택을 기다린다. 왕조시대에는 왕이, 지금은 국민대중인 우리가 그걸 고른다. 우리는 그저 쇼핑하는 고객일 뿐이다. 그걸 선거라고 부른다.
그렇게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생산되어온 명분이라는 게 대개는 구태의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창조적인 신제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특허품까지는 못되고 실용신안이라도 꾸준히 내면 그 정치는 나름대로 골라먹는 재미가 있을 터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 정치가들의 그런 속성을 은폐한 우아한 담론을 신앙해왔다. 그래서 창조적인 신품들이 별로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베끼기만을 너무 오래 즐겼다.

조선 5백년은 중화주의 카피에 다 바쳤고 해방 이후 60년은 남쪽에서 미국식 자본주의 베끼기 열풍이 지속됐고 북쪽에선 스탈린의 모험주의가 꾸준히 복습됐다. 근래 들어서야 새로운 제품 개발의 욕구가 생겼고 그 결과 참여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다수 대중에겐 지나치게 낯설었던 듯하다. 그래서 결국 외면당하고 그 깃발 아래 모였던 이들이 다시 새로운 명분을 찾아 이합집산 하는 데 아직 썩 산뜻한 메뉴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손학규가 새로운 문명 운운했다. 급한 김에 나온 변명답게 아직 다듬어진 상품은 못된 듯하다. 다듬어지면 어떤 메뉴가 될지 관심이 간다. 이제껏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 새로운 문명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면 쉽게 입으로 뱉어낼 표현은 못될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무수한 인명을 제물로 바치지 않고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 경우는 없었다. 그것이 내 편이든 네 편이든 피 흘림은 이제까지 문명의 탄생에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앞으로의 신문명이 어떻게 올 것인지를 관성에 매어 예단할 일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명이란 가볍게 입에 올릴 주제도 아니다. 낭만적으로 꿈꾸는 미래가 실현 가능해 지려면 그에 합당한 값비싼 대가 또한 치룰 각오를 해야 한다. 위험을 피하며 거저먹을 떡은 없다.
그렇다고 새로운 문명시대를 피할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랬다가는 미래라는 시간 열차를 놓치고 또다시 백여 년 전의 악몽을 되풀이 하게 될 테니까.
어쩌다 보니 손학규로 인해 사고의 넘나든 거리가 제법 멀다.

홍승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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