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적은 내부에 있다
[한반도] 적은 내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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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경의선 철도 개통식 현장. 한 통화의 전화가 걸려온다. 남과 북의 경의선 철도 개통을 허가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는 일본정부에서 걸려온 전화이며, 경의선 철도에 대한 모든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덧붙인다. 결국 개통식은 취소된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경의선 철도에 대한 권리를 취득하게 되었는가. 이제 영화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우석 감독은 영화 한반도가 ‘반일’영화가 아닌 ‘극일’영화라고 소개했다. 극일이라, 그러니까 일본을 뛰어넘자는 얘긴데, 그럼 어떻게 넘어야 하는 걸까. 영화를 보며 내내 생각했다. 영화는 관객을 대한제국 말기로 끌고 간다. 20세기 초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나라의 풍경은 침울하다. 쇠락한 국운, 자기안위만을 챙기려는 신하들 사이에서 쓸쓸함이 유독 도드라지는 고종황제의 왜소한 자태. 여기에 간악한 일본제국의 협박이 더해져 식민지로 편입되는 찰나의 대한제국 풍경은 그야말로 쓸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외세의 압박에 포위된 힘없는 황제의 표정은 결코 그때 그 시절의 문제로 일단락 된 것이 아니라고 감독은 말한다.

영화는 수시로 대통령의 표정과 고종황제의 표정을 번갈아 보여주며 나라를 빼앗겼을 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 가운데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강변한다. 빼앗긴 들에 봄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우리는 여전히 한반도의 주권을 행사한 적이 없다. 영화가 관객에게 질문 하는 지점은 여기서부터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먹고 살기 위해 외세의 존재를 인정하고 수락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먹을 것 못 먹더라도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려 분투할 것인가. 영화 한반도는 이 두 가지 물음을 끝까지 끌고 가며 관객을 영화로 몰입하게 만든다. 내가 볼 때 이 영화에서 주된 테마로 등장하는 대한제국 국새의 존재는 맥거핀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한일관계에 대한 첨예한 두 입장은 ‘현실적인 것’이지만, 대한제국 국새는 ‘영화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일관계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부분이 있다. 이것은 영화가 정치를 말할 때 감독들이 쉽게 저지르는 오류이기도 하다. 이는 특정한 인물의 부각이다. 우리도 ‘인디펜던스데이’의 영웅적인 대통령을 갖고 싶었던 것일까. 한반도에 등장하는 대통령도 민족의 자긍심과 사명감으로 충만한 영웅적인 인물이다. 그는 진짜 국새를 발견하는 작업을 기획하고,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결단력 있는 행동을 견지한다. 여기에 재야사학자로 등장하는 최민재라는 인물 역시 민족의 수난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는 뛰어난 역사적 감수성의 소유자다. 그는 20년간 한.일관계 연구에 생을 투신한 도덕적으로 올곧은 인물로 묘사된다. 문제는 한.일관계와 통일문제 같은 민족문제들이 이들의 의해서 해결된다는 것이다. 다분히 국민들의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하는 첨예한 사안들이 소수의 영웅들의 의해 봉합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특정영웅의 행적을 찬양하고 부각하는 프로파간다의 형식은 한반도에 등장하는 대통령의 과단성과 최민재의 도덕성과 포개진다. 프로파간다적 영웅의 특징은 민중위에 존재하거나 민중을 배제한 채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다. 국가가 문제해결을 위한 정치적 공동체라면, 프로파간다적 영웅은 국가 위에 존재하거나 국가와 동일시된다. 한반도의 무의식에는 이런 초국가적 영웅에 대한 소망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는 불편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민족을 말하고 민족을 부르짖는 이 영화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은 휘발 되어 버렸다. 영웅/권력자들의 의해서 국가의 명운이 걸린 문제들이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모습에서 일부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낄지는 모르나, 민중들이 거세되어 있고 권력자들만이 등장해 문제들 해결한다는 이 일련의 과정은 정치적으로 유사파시즘에 가깝다. 그러니까 일부 저널에서 지적하듯, 이 영화에서 민족주의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은 과잉해석에 가깝다. 또한 할리우드를 비롯한 서구에서 제작된 민족주의성찰과 관련된 영화, 이를테면 9.11 이후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폴 해기스의 ‘크래쉬’, 스티븐 개건의‘시리아나’, 앤드류 니콜의 ‘로드오브워’ 등의 영화나 유럽의 인종주의를 다룬 영화, 이를테면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 같은 영화들과 한반도를 비교하는 것은 맥락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요컨대, 영화 한반도는 한일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층위의 갈등 상황을 비교적 잘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결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오류를 저질러버렸다. 민족과 국가의 명운이 걸린 문제에서 민중들을 배제한 채 소수의 권력자들에게 문제해결을 일임해 버리는 영화의 태도는 유사파시즘의 행태와 닮아있다.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당연하나, 이제 우리 역사에서 간신히 극복되려는 파시즘의 흔적을 영화에서 보게 되서 꽤나 곤혹스럽다. 역사를 다루는 영화임에도 역사에 대한 교훈은 빠뜨린 셈이다. 진짜 적은 내부에 있다.

 
영화평론가
제휴 네오이마쥬<htttp://www.neoimag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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