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와 붉은색
한국사와 붉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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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의 진통이 길어지면서 한국현대사를 짓누르던 레드컴플렉스가 또다시 기승을 부릴 조짐이 보인다. 진보는 곧 ‘빨갱이’라고 인식하는 6.25 전쟁세대는 그렇다 쳐도 전쟁이 끝난 지 햇수로 올해 60년째이건만 종전 아닌 휴전으로 끝맺은 전쟁 탓인지 여전히 붉은색은 금기로 되살아난다.

그런데 올해 총선을 앞두고 환골탈태를 선언하며 당명마저 바꾼 새누리당이 당의 상징색으로 빨간색을 선택한 것은 꽤나 이채로웠다. 노동자들이 머리에 빨간 머리띠를 두르는 것만으로도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사상을 의심하던 한국사회의 변화라면 큰 변화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보수우익 정당이 아니면 결코 빨간색을 선택하지 못했을 한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했다. 현재의 야당 어느 곳에서라도 빨간색을 당의 상징색으로 썼다면 당장 사상논쟁에 휘말려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컸을 테니까.

실상 빨간색에 대한 그런 금기는 지극히 한국적인 현대사의 비극을 드러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예로부터 빨간색은 제왕의 색이요, 권력의 색, 다시 말해 선택받은 자들의 색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선시대에는 9품까지 총 18개 계급으로 나뉘는 조정의 벼슬아치들 중에서도 3품 이상 당상관들만 조정에 나갈 때 빨간색을 입었다.

그런 의미에서 새누리당의 빨간색은 60년을 짓눌러온 한국사회의 레드컴플렉스를 희석시키는 발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5.16 이후 불과 10년을 제외하곤 줄곧 집권해온 장기 집권 여당의 오만을 드러내는 색이기도 하다.

어떻든 붉은 색-때로는 자주색-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화를 간직한 우리 민족사 속 건국시조들의 색이기도 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은 빨간 보자기에 싸이고, 하늘로부터 자줏빛 줄이 내려온 곳에 서 알을 담은 상자가 발견되기도 했다. 붉은 색 혹은 자주색은 실상 하늘 자궁과 자손을 연결시키는 탯줄의 상징이기도 했을 터이지만 예로부터 이 색은 상서로운 제왕의 색으로 자리매김 돼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빨간색이 조선시대로 오면 평민들에게도 허락될 때가 있으니 바로 혼인하는 신부들이 입는 녹의홍상, 즉 녹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가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요즘도 흔히 쓰이는 말 가운데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다. 실상 여성은 젊어야 맛이라는, 지극한 남성중심주의의 산물이지만 의미를 잊은 채 여성들도 곧잘 쓰곤 한다.

역사 속에서 보자면 빨간색은 군대의 깃발에서도 쓰였고 왕의 행렬 앞에도 쓰이는 등 다양한 곳에서 사용됐다. 빨간색은 심장을 뛰게 하는 열정의 색이니 군대에서 이 색을 깃발로 쓰는 것은 당연하겠다.

우리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영웅, 치우-한단고기는 치우를 고조선 이전의 배달국 제14대 자오지환웅이라고 밝히고 있다-를 상징하는 색이 붉은 색이어서 붉은 색이 그 옛날부터 무력과는 불가분의 관계였던 듯하다. 치우는 지금 중국사 속으로 흡수되어 갔지만 그 이전, 황제에 저항하다 죽임을 당했다는 중국사 속 서술에도 불구하고 민중 속에서는 반역자가 아니라 후대의 제왕들에게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았다.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치우 사당에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사대주의의 미망에 사로잡혀 치우를 황제에 대한 역신(逆臣) 정도로 폄하하던 조선시대에도 전장에 나가는 장수는 치우묘에서 비롯된 둑신사에서, 혹은 전장에서는 둑기만 놓아둔 곳에서 둑제를 지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초하루, 보름이면 둑제를 지낸 기록이 나타난다.

그 전쟁의 신,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 비견되는 군신 치우의 상징색이 붉은 색이라는 것은 그만큼 전투력을 고양시키는 색,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색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데도 청군과 홍군으로 나뉘어 경쟁하고 시합하던 전통은 레드컴플렉스에 굴복해 초등학교 운동회에서조차 청군과 백군으로 바뀌었다.

그런 굴절은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 사고의 틀을 작고도 견고한 것으로 만들어 창의적 발상을 종종 가로막는다. 다시금 그 레드컴플렉스로 한국사회를 뒷걸음질 치게 하려는 세력들이 이즈음 몹시 분주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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