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한국어의 운명
한글과 한국어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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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은 한글날이었다. 국경일에서도 소외된 기념일이지만 한글은 그 제정의 의미를 밝힌 훈민정음해례본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세계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명확한 의도를 갖고 만들어진 글자이며 창제된 배경과 시기가 명확한 글자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소수민족인 찌아찌야족처럼 동남아의 일부 자체 언어는 갖고 있지만 글자를 갖고 있지 않던 종족에게는 한글이 새로운 그들의 표기법으로 채용되는 등 새로운 출구를 찾아 나가고 있다. 배우기 쉬운 과학적 구성 원리에 어떤 발음이든 표기할 수 있는 소리글이기 때문이다.

이 소리글에 대한 우리 민족의 욕구는 한글이 탄생하기 이전, 한자로 표기하던 시절부터 독특하게 발휘돼 왔다. 한문을 이용한 이두, 향찰, 각자 등이 글자는 한문으로 쓰되 우리말로 읽고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대 시대마다 각기 다르게 사용돼 왔다.

쐐기글자처럼 한문 문장 옆에 날카롭게 다듬은 대나무 필기구로 눌러 쓴 각자가 주로 불교 서적 등에서 발견되어 특수한 용도로 알려져 왔으나 석가탑 해체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묵서에 이 각자를 먹으로 쓴 것이 발견돼 해독용이 아니라 우리말의 소리글자로서 사용되었음을 알려줬다. 이 각자가 일본의 고유문자라는 가타가나의 근원이라는 주장이 최근 일본에서 일본인 학자에 의해 제기돼 관심을 끈다.

각자가 새로운 글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하면 향가라는 문학 형식을 오늘날까지 전해주는 향찰이라는 신라식 이두표기는 한자를 글자로 사용하되 뜻으로만 쓰지 않고 종종 음으로 빌려 쓰고 있다. 우리말 어순에 맞춰 한자를 사용할 뿐 아니라 다양한 동사, 부사에 토씨까지 표기해 우리말의 표기를 완성시키고 있다.

이 향찰은 비록 고려 초기까지 사용되다 사라졌다고 하나 일본 정통 역사서라는 일본서기의 일부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 기록물이라는 만엽집 거의 전부가 향찰로 기록됐다는 점을 이제 일본인 학자들도 인정하는 추세다. 그렇게 신라의 말은 우리가 현재 쓰는 말속에 녹아 있고 신라인들이 쓰던 글자는 대다수의 문서들이 유실된 한반도 대신 일본 열도에서 그들의 귀한 유물로 대접받으며 살아있다.
이두표기는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까지 계속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태종 때 발간된 경국대전에서 밝혀지고 있다고 한다. 본문은 중국식 문법에 따라 쓰고 그 옆에 우리말의 어순과 표기를 따른 이두문을 붙여 사대부가 아닌 이들도 읽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세종과 같은 영민하고 혜안을 갖춘 임금이 나타남으로써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 속에 살아남았던 다듬어져 온 한글도 한국어도 ‘글로벌’을 외치는 시대조류에 떠밀리는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말은 불완전하게 발음하는 아이들이 영어발음은 원어민 발음을 따라가겠다고 버둥대고 있다. 한글 맞춤법이 틀리는 것은 부끄러운 줄 몰라도 영어 철자가 틀리면 매우 창피해 한다.

‘나’를 버리는 것이 글로벌은 아닐 터이다. 발음이 원어민 같아야 세계인과 소통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영어도 사용되는 나라마다 발음이 구구각각이지만 그들끼리는 서로 다 통하지 않는가.
한국인이든 세계인이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글로벌시민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분의 영어 발음은 요즘 아이들 식 표현으로 하면 영 구리다.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해도 이래저래 듣는 소리는 있는 필자의 귀에도 반 총장의 영어 발음은 소위 말하는 원어민 발음과는 거리가 있게 들린다. 그래도 그는 세계와 자유롭게 소통한다.

세계만 쳐다보다 보니 전 세계 한민족이 함께 지켜야 할 민족어로서의 우리말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식고 있다. 정치적 입김에 쓸려가는 탓인지 남북한이 통일을 대비해 함께 추진하던 ‘겨레말큰사전’ 편찬 작업도 요즘 난항을 겪고 있다는 답답한 소식이 들린다. 한글날을 앞두고 들린 가장 답답한 소식이다. ‘민족’은 세계의 중심이 되지 못한 인류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발판이고 민족 언어의 동질성은 민족이 정서적 통합을 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런 중요성은 무시되고 너나없이 실체도 모호한 글로벌이라는 격류에 휩쓸려 아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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