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과 北의 '황태자'
南과 北의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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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6월 들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에 대한 미확인 보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망명설이 나오더니 망명설을 부인하는 김정남의 코멘트를 직접 딴 기사가 나오는 식으로 주고받기도 이루어졌다.

이런 특정 이슈의 기사들이 별다른 사건 없이 갑작스럽게 증가하는 일에 우리는 습관적으로 의심을 해보게 된다. 힘을 가진 쪽에서 무언가를 덮거나 혹은 한 방향으로 관심을 끌고 가려했던 역사적 경험에서 얻은 반사적 습성이다.

그런데 올해는 지자체 선거를 전후해 일었던 ‘북풍이 역풍’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난 이후에 이런 기사들이 오히려 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 가운데서도 지난 8일 대표적인 보수성향의 메이저 신문 중앙일보에서 ‘김정남의 사모곡’이라는 기사가 은근히 화제의 중심에 섰다.

특히 이 기사가 첫머리에서 김정남을 ‘비운의 황태자’라고 표현한 것을 두고 그 의도에 의심을 갖는 이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그 중 한 사람으로부터는 “하필 중앙일보가 그런 표현을 썼다는 게 무슨 의도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는 질문 아닌 질문을 받았다. 그는 북한의 권력세습을 정당화시킴으로써 삼성그룹의 경영권 세습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삼성이 드디어 대한민국을 삼성공화국으로 만드는 데서 더 나아가 삼성 왕국으로 다스리려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스런 비평을 하기도 했다. 김정남을 ‘황태자’로 표현함으로써 드디어 삼성 후계자의 ‘황태자’ 등극시키기가 본격화되는 것이라는 비판도 따랐다.

이런 비판적 시선들을 잇달아 접하며 언론이 상투적으로 쓰는 언어에 묻어있는 다양한 냄새가 새삼스레 느껴져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과거 현대그룹 내의 형제간 다툼이 벌어졌을 때도 언론은 일제히 ‘왕자의 난’이라고 표현하면서 재벌그룹의 세습체제를 정당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번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서 사람들이 그 표현에 유난히 민감한 이유는 삼성과 특수관계인 신문이 차기 경영권 세습 예정자에게 ‘황태자’라는 칭호를 쓰고 싶은 욕구를 드러냈다고 보기 때문인 듯하다. 현대그룹의 후계자들이 ‘왕자’였으니 삼성그룹 후계자는 ‘황태자’가 돼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그 중 하나일 터다.

이제까지는 북한의 정권 세습은 시대착오적인 행태라고 흉을 보면서도 한국 재벌들의 경영권 세습은 당연시해왔던 한국 사회다. 그러나 차츰 재벌들의 경영권 세습이 매우 낙후된,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행태라는 비판이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을 법하다. 그런데 북한의 정권세습을 당연시하는 ‘황태자’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북에는 정치적 황태자, 남에는 금권적 황태자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했다.

물론 ‘황태자’라는 단어 사용은 언론의 습관적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하필 그룹 경영권 3대 세습 문제가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상황에서 그 재벌과 특수관계인 신문을 통해 등장했다는 점에서 더 관심을 모으는 듯하다.

북한의 정권 3대 세습이 놀림거리가 되는 동안에도 삼성은 경영권의 3대 세습을 위한 준비를 매우 착실히 해나가고 있다. 그런 삼성의 준비과정은 곧 경영권 세습을 원하는 모든 재벌들에게 중요한 롤 모델이 될 수 있다. 물론 롤 모델 없어서 경영권 세습을 포기할 재벌들은 아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 재벌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 미치는 영향의 범위가 클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CEO라고 표현한 이명박 대통령의 얘길 빗대서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CEO가 대통령이라면 최대주주는 삼성’이라는 얘기가 농담처럼 나돌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대한민국 경제 성적표에서 ‘삼성’을 빼면 건질게 별로 없다는 점에서 결코 농담만 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이 청와대를 떠나 ‘시장’으로 옮겨갔다고 표현했었지만 재벌들에게로 넘어간 상태라고 해야 더 정확할 수도 있다. 이미 그들은 권력이 됐으니 ‘황태자’인들 못쓸 이유가 없다 여기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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