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등급 상향의 명암
신용등급 상향의 명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의 한국 신용등급이 한 단계 상향 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주 중반, 여당에서는 MB 정부의 경제정책이 성공한 신호라고 환호했고 증시 역시 훈풍으로 받아들였다.

잘했다, 잘 하고 있다는 외부의 평가는 앞으로 더 잘 할 것 같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고 국가 신용등급이 높아지면 외국인들을 한국 증시로 끌어들이는 긍정적 효과도 기대할만하니 시장이 반기는 것은 당연하겠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제목의 책이 꽤 오래도록 베스트셀러였던 적도 있을 만큼 우리 사회는 외부의 칭찬에 목말라 한다. 유달리 신명의 있고 없음에 일의 성과가 큰 차이를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칭찬은 신명을 끌어올리기에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다. 국제사회의 칭찬이라 할 국가신용등급 상향에 유난히 민감한 이유도 그런 대중정서와 크게 관련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지난 시절 자료들을 보니 공교롭게도 한국의 신용등급이 가장 높았던 시점은 외환위기 직전이었던 1997년이었다는 점이 발견된다. 그 당시에는 외국의 여러 신용평가사들이 앞 다퉈 한국의 신용등급을 끌어올렸다.

이게 단순히 우연일까. 그렇다고 무슨 ‘음모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국가 신용등급이 올라가며 외국인 투자가 늘겠지만 소위 핫머니라고 불리는 단기성 투기자금도 일시에 몰려들어 난장을 치는 부작용도 따른다. 호사다마(好事多魔)다.

1997년 당시 선진국의 금융 장세 속에 몸집이 갑자기 불어났던 핫머니는 급성장 중이던 개발도상국, 그 가운데서도 개방된 시장의 경험이 일천했던 아시아 시장을 집중 공략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떼 지어 몰려다니며 각국 시장을 헤집어 바닥에 가라앉았던 사회 기반 자산까지 모조리 수면 위로 부유하게 만들고 이를 거둬갔다.

당시 각국 정부는 핫머니의 위력을 충분히 파악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핫머니의 정체와 영향력에 대한 우려가 나와도 각국 정부는 충분히 ‘관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듯하다.
그러나 결과는 동아시아의 외환위기 도미노 현상과 더불어 한국의 IMF 구제금융 신청으로 비로소 뜨거운 열기가 조금 빠졌다. 뜨거운 열에 들뜬 열기구처럼 정신없이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던 핫머니도 잠시 진정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핫머니의 속성 자체가 사라졌거나 근원적인 힘이 약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언제라도 시장을 달아오르게 할 힘이 내재돼 있다. 특히 요즘처럼 실물 부문의 발전이 지지부진한 채 금융장세에 기댄 억지 성장전략을 쓰는 사회가 핫머니를 키우는 토양이다.

미국산 핫머니가 특히 기승을 부리는 이유 역시 금융 강국 미국의 경제시스템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 미국이 여전히 실물부문의 회복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금융에 의지한 경기회복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지금 세계경제에 영향을 미칠 각국이 너나없이 금융을 지렛대 삼아 경기회복을 도모하고 있다. 중국의 환율정책이 세계경제에 위험한 폭발성을 지닌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한국 역시 크게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은 핫머니의 성장을 자극하고 한번 덩치가 커진 핫머니는 금융시스템에 위기가 닥칠 때까지 자가 증식을 계속해 나갈 수밖에 없다. 가장 인간의 욕망에 합당한 시스템이라는 자본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특히 성장에 조급한 사회에서 이런 괴물을 길러내고 있다.

자본의 국경이 허물어진 오늘날 이런 투기자금들이 시장을 옮겨 다니며 난장을 벌이고 또 일시에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 버리면 사회적 기반이 빈약한 국가부터 뿌리 채 흔들리는 위기를 맞게 된다. 신용등급 상향은 그런 위험도 동반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 이미 지난 외환위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 경험의 유효기간은 지난 10년으로 끝난 것이 아닌가 싶다. 사회적 안정 기반이라 할 다수 국민의 소비여력을 바닥내기라도 할 듯 무섭게 치솟는 물가는 방치하고 봉급생활자들의 소득은 쥐어짜고 있다.

물가보다 수출을 앞세우며 저금리 정책의 약효에 취해 조정의 시기를 놓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커져가는 이즈음이다. 지금 또 1997년의 악몽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 시간 주요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