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위기론과 정치 역학
이건희 위기론과 정치 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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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24일 경영일선 복귀를 선언했다. 복귀선언의 명분은 경제위기론.

어떤 이유를 붙이기 이전에 그에 대한 특별사면이 내려진 순간부터 그의 복귀는 사실상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 일이라 그의 복귀가 새로울 것도 없다는 게 일반적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때마다 들고 나오는 위기론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번 경우는 도요타 자동차 사태로 인한 한국 재계의 위기의식을 디딤돌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소의 구체성을 띄었다면 그렇다고 인정할 만도 하다. 일본식 경영 중에서도 배타적, 세습제왕적 경영 방식만을 유독 답습해온 한국 재계로서는 도요타 사태에 다른 어느 나라의 대기업보다 큰 충격을 받았음 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의 위기론은 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나왔다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경영복구의 명분으로 내세운 위기론 역시 보수 여당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그의 발언이 대중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한 출발점은 1993년 삼성 신경영 10년을 선포하면서부터다. 오래 전 일이라 표현이 정확하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대강 뜻은 그랬다. “아내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자” “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등등.

혁신과 더불어 엘리트주의를 강조한 이 표현이 한동안 참신함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출현하고 오랜 세월 이 땅을 지배했던 군사독재의 끝을 본 시기였다. 이건희 회장의 이런 표현들은 당시 정권의 취향, 나아가 요구와도 맞아떨어졌다.

물론 이런 혁신을 통해 삼성은 비약적 성장을 했으므로 굳이 정치적 의미를 갖다 댈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 모두가 말렸다는 자동차 산업에 문민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얻어내며 무리하게 뛰어들어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 전체가 위기를 맞는 데 일조했다. 삼성 역시 그 후유증을 크게 앓았다.

그러던 이건희 회장이 참여정부 들어서는 진정으로 위기의식을 느꼈던 듯하다. 2003년 신경영 10년을 정리하면서는 “천재 1명이 1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엘리트주의를 표방하고 나선다. 국내외를 부지런히 오가며 석`박사 학위 소지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열중했고 특히 미국 학위 소지자들이 환영을 받았다.

설사 고졸 출신 대통령 체제에서의 평등교육 이념에 대한 반감이 담겨 있었다 해도 글로벌 경영을 표방한 이런 젊은 인재유치 노력 자체를 비판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무노조’를 자랑하는 삼성의 생산직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탄압 사례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는 진보정권의 끝을 보자고 이를 악물었던가 싶을 정도다. 당사자가 겪는 위기도 배경이 됐겠지만 연초부터 예의 위기론이 등장한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성장 동력을 잃는다는 샌드위치 위기론, 5~6년 내에 더 큰 위기가 올 것이라는 위기감 극대화 주장들이 쏟아졌다. 재계에서도 함께 화답했다.

당시 한국경제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모든 경제수치도 호조를 보였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앞으로 몇 년 내에 위기가 올 것이라는 국내 최대 재벌 총수의 발언은 대중들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소위 말하는 경제 대통령이 출현했다.

이번 경영 일선 복귀의 명분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 위기론이다. 물론 위기의 근거는 도요타 사태였다. 그렇다고 이번 위기론이 대규모 광고물량으로 언론의 입을 막고 비판에 귀를 막다가 대규모 리콜 사태를 빚은 도요타의 전철을 피해갈 계기가 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위기론을 들고 나온 시점이 차라리 이건희 회장을 선거를 앞둔 보수 여당의 위기탈출을 돕기 위한 해결사로 보이게 한다. 도요타의 대규모 리콜 사태는 이미 2009년 10월부터 시작됐다. “당분간 평창 올림픽에 전념하겠다”며 “삼성이 약해지면 돕겠다”고 말하던 지난 2월이면 도요타 사태는 이미 충분히 진행된 때다. 그 사이에 갑자기 위기가 고조됐다?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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