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안정의 그림자
환율 안정의 그림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주초 1315원까지 치솟던 환율이 사흘 만인 9일 증시 호황과 더불어 1320원대로 수그러들며 안정세를 보였다. 이런 현상은 물론 정부 개입과는 무관하게 세계 증시 호황에 따라 덩달아 유입된 외국인 투자자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주 외환보유고를 위험한 수위까지 풀면서라도 환율 안정을 시키겠다며 지나치리만큼 노심초사하는 정부의 눈길이 멈춰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환율은 내려갈수록 좋다는 매우 단순한 사고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종종 염려를 갖게 된다.

환율은 그렇게 한 면만 볼 수 없는 양날의 칼과 같다. 상품을 수출하는 입장에서야 환율이 떨어지면 저절로 낮아진 임금 코스트의 덕분에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수출이 유리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정부가 보는 눈을 그 한편 쪽으로만 쏠려 있다.

물론 환율 안정으로 해외여행이 줄어들고 해외에서 한국을 방문하는 여행객 수는 늘어 모처럼만에 여행수지 적자를 면했다니 일단은 환율안정이 몫을 하긴 했다. 섣부른 해외 부동산투자도 주춤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유행처럼 번지던 조기 해외유학도 주춤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이런 부문은 아직 한국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

지금의 한국경제 상황에서 상품수출만이 우리 경제의 중심축이 아니다. 우선 수출이 늘면 늘수록 수입도 따라 늘 수밖에 없는 개방된 시장 상황만 봐도 그렇다.

수입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환율이 떨어질수록 경영은 악몽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 IMF 위기 때도 중소 수입업체들부터 먼저 부도로 무너져갔다. 그러면서 연쇄부도가 가속화됐다. 건물의 한쪽 기둥이 무너지면 자연스레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을 그 때 확실히 경험했다.

현재 한국의 상품 생산 코스트에서 수입원자재 사용비중은 여전히 높다. 따라서 수출업체들 입장에서도 당장의 가격경쟁력에 환호하기에는 그 벌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다.

생필품 가운데 수입품의 비중도 급격히 높아진 상태여서 환율 급락은 소비자 물가의 불안요인으로 만만찮은 역할을 한다. 값싼 수입품을 대체할 국내 생산기반은 이미 상당 부문에서 붕괴된 상태다. 결국 값싼 수입품들이 값비싼 수입품으로 탈바꿈하면서 내수시장에 가해질 타격이 그만큼 커진다는 의미다.

국내의 생산·소비 시장 상황으로만 볼 일도 아니다.

대기업들이 국내에서는 여전히 투자처를 찾지 못해 생산설비 투자 대신 하릴없이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해서 자산증식에만 매달린다. 이런 처지라면 차라리 해외투자라도 할 만한 곳을 찾아야 한다. 이즈음의 대기업들 행태를 보고 있자면 기껏 공부시켜 놨더니 방안에서만 뒹구는 백수 자식 보는 심정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백수 자식이 해외로 나가기도 어려워진다. 정부가 애써 안정시킨 환율이 기업의 해외진출에 발목을 잡을 테니까.

물론 현재의 환율 수준을 놓고 그토록 심각하게까지 걱정할 수준은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세계 어느 곳에도 마땅한 투자처가 없어 주저하고 있다고 봐도 그 뿐인 상황이다.

문제는 정부의 사고 자체다. 자꾸 20년 전, 30년 전으로 퇴행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게 걱정스럽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던 시절, 수출만이 살길이라며 가난한 농촌 여인네들 머리카락까지 잘라 팔던 그 시절의 기억 속에 사로잡혀 있어서야 어떻게 변화된 시장 상황에 적응할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글로벌을 외치며 영어 조기교육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정부치고는 참으로 고답적인 발상을 종종 하다 보니 보는 국민의 입장에서 걱정을 그칠 수가 없다. 영어를 단지 수출전선의 역군 길러 내기용으로 그토록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글로벌 시대에 맞추려면 먼저 멀티 플레이어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멀티 플레이어다운 발상으로 세계를 보는 시각부터 재구성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모든 상황을 우선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열린 사고 없이 외치는 글로벌은 공염불이 되거나 새로운 도그마에 그칠 뿐이다. 그런데 국내 정치상황이나 경제정책이나 서로 맞물려가며 자꾸 복고주의로 나아가는 듯이만 보여 안타깝다.


이 시간 주요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