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정부 위기대응에 '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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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서브프라임 사태 배제 못해"
10년전 외환위기 당시 수술대에 오른 부실 금융회사와 기업들의 구주조정을 집도했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3년여만에 다시 현안을 겨냥해 입을 열었다.

이 전 부총리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주도로 설립되는 서울대 금융경제연구소 창립을 앞두고 28일 열린 강연회에 강사로 등장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에 올라 구조조정으로 화려하게 명성을 날린 이 전 부총리가 공식 석상에 나타난 것은 것은 지난 2005년 3월 전 정권의 경제부총리에서 물러난 이후 3년여 만이다.

오랜만에 입을 뗀 이 전 부총리는 할말이 많았던 듯 거침없이 국내외 경제 현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놨다. 현 정부의 위기 관리 능력과 정책에 대한 쓴소리가 많았다.

◇ "한국판 서브프라임 사태 배제 못해"
이 전 부총리의 상황 진단은 사뭇 심각했다. "한국경제가 현재 위기냐 아니냐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글로벌 위기 초기 판단의 안이함, 정책의 신뢰상실과 실기에 의해 문제가 가중되고 있는 일종의 진행형 위기"라고 진단했다.

현 경제위기는 비록 국제금융시장에서 비롯됐지만 제조업의 성장과 고용증대 동력의 약화, 기술혁신과 금융을 포함한 서비스업 경쟁력 제고의 지지부진이라는 국내 문제와 겹쳐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내년이 올해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면서 한국이 기초수지 부문의 급속한 악화와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 비율 악화로 은행 자금의 불통 현상이 더해지면서 마지막 활로인 수출에 쓰일 원자재를 구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10년전 자신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금융부문이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금융이 소비자금융이나 프로젝트 파이낸싱(PF)과 같은 영역을 개척하기는 했지만 리스크 관리 역량처럼 근본적 경쟁력에는 뚜렷한 향상이 없었다"며 "한국형 서브프라임 사태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경고했다.

구체적으로는 은행의 유가증권 투자 과다에 따른 건전성 악화, 외화자산과 부채간 만기구조의 미스매칭, 주택시장의 효율성 저하 등을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 "초기진화 실패 남대문 참상 재현 걱정"
이 전 부총리는 그간 쌓여온 문제가 심각하다면 이를 털어내기 위한 대책은 '전광석화'(電光石火)여야 하는데 현 정부의 위기대응은 그렇지 못했다고 질타했다.

그는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은 시장 원칙에 충실하되 도덕적 해이는 피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만 시장의 실패가 있을 경우엔 지체없이 정부가 직접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논란을 두려워해 시간을 끌다보면 사태가 악화될 수 있으며 사전적 예방과 즉각적인 처리는 사후 수습과 복구에 비해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춰 금융위기 발생이후 정부의 대응 추이를 볼 때 "초기 진화에 실패한 남대문 화재의 참상이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든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현재의 경제 위기가 국내 정책의 잘못이 아니라고는 하나 현 정부의 안이한 인식과 한 발 늦은 대응이 오늘의 위기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 "극약처방도 서슴지 말아야"
이 전 부총리는 "대기업의 과다차입과 과잉투자에서 비롯된 1997년 위기와 현재는 다르다"면서 "신속하면서도 도덕적 해이를 일으키지 않는 확고한 처리방법의 강구가 어렵다"고 상황의 어려움을 인정했다.

지금은 대외부문의 동력인 수출 중소기업과 내수의 주요한 축인 중소 건설업은 물론, 저축과 내수를 이끄는 주체인 가계까지 무수한 주체가 어려움에 빠진데다 중간에는 저축은행, 카드사 등 다양한 중개기관이 엇물려 있어 구조조정 대상의 수가 크게 확대돼 '묘수풀이'를 어렵게 한다는 견해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거대 수출처와 작지 않은 내수가 있는 점, 경쟁국과 달리 탄력적 활용이 가능한 국책 금융기관의 존재, 재정운용을 제약하지 않는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부채 등을 우리가 경쟁국보다 더 누릴 수 있는 강점으로 꼽았다.

다만 이들 수단을 활용하는데 있어 전제조건을 달았다. 정부가 시장의 믿음을 얻고 정책수단의 강도는 '상황을 압도할 정도로 단호하고 충분해야 한다'며 "필요하면 극약 처방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 "감세.금융감독체제 문제있다"
이 전 부총리는 현 정부가 내놓거나 준비하고 있는 정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예를 들어 비판했다.

그는 현 정부와 여당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감세안을 문제삼았다.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감세보다 재정지출 확대가 더 효과적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도 무작정 쏟아넣는 식의 재정지출에는 제동을 걸었다.

정부 일각에서 이런저런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논의되고 있지만 이런 분야의 투자를 서둘렀다가는 과거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보다는 지방, 농촌의 하수처리시설이나 에너지 절약시설 같은 어차피 해야 할 것에 집중하라고 충고했다.

외환위기 당시 자신이 틀을 만든 금융정책기구의 현 운용방식도 비판했다. 정부는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위해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을 별도로 두고 있지만 이는 비상시의 위기관리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때문에 당장 한 사람이 맡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전 부총리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부처간 정책공조가 급한만큼 정부 내에 위기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점검.판단할 수 있는 통합대책기구인 '워 룸(War Room)을 한시적으로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그는 위기에는 위기에 걸맞는 조직과 리더십이 필요하다면서 기동성과 집중력이 뛰어난 소수정예의 몽고 기병대와 이를 이끌었던 칭기즈칸의 리더십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는 말로 긴 강연의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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