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정책의 딜레마
통화정책의 딜레마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씨티그룹, 도이치방크, UBS, JP모건 등 국내에서 영업 중인 외국계 은행들은 한국은행이 몇 달 안에 금리를 인상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은행이 지급준비율을 올린 직후인 11월 말 나온 이들 외국계 은행들의 보고서가 하나 같이 그렇게 점쳤다.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해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콜금리 인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분석한 것이다. 금리를 손대지 못해 지급준비율로 통화조절을 시도한 한국은행의 정책이 미봉책임을 즉각적으로 지적한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나 어찌됐든 12월초 한국은행은 콜금리를 거푸 동결했다. 그로 인해 부동산 시장보다는 경기를 선택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환율에 끌려 다니는 통화정책, 성장·물가·환율의 세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정책 실패 등 갖은 비판도 받았다.

그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통화당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수경기가 죽을 쑤고 있는 상황에서 수출경기마저 시들면 국가경제 자체가 캄캄한 터널로 들 수도 있으니 환율을 결코 가벼이 볼 수는 없을 터이다. 더욱이 세계적인 달러 약세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그 낙폭이 영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원화의 환율 낙폭이 일본 엔화의 2배를 넘으면서 수출업체들은 지금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런 한편에선 외국 여행 나간 우리 국민들의 씀씀이가 사상 초유라는 말이 결코 허풍일 수 없게 연일 신기록 갱신 중이다.

엔화보다 곱절 이상 빠르게 치솟고 있는 원화 값의 상승에 기름을 부을 수 없는 한국은행의 고민에 관전하는 입장에서 비판을 쏟아 붓기는 쉽다. 그러나 국부의 쏠림현상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책적 조율이 잘 먹혀들지도 않는데 백약이 무효인 상황에서 처방전을 내야 하는 정책당국자들 처지도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TV뉴스는 환율 때문에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시대가 앞당겨질 것 같다고 앵커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전망을 전한다.
그런 뉴스 진행을 보고 있자니 70년대 중반 정부에 의한 인위적인 환율인상을 지켜보던 직장인들이 모여앉아 나누던 허탈한 농담이 문득 떠오른다. 수출업체 직원이던 그들은 회사가 살판 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가만히 앉아서 월급을 감봉 당했다”고 투덜댔다. 원화 봉급은 그대로인데 원화 값이 떨어졌으니 달러 베이스 월급은 그만큼 줄어든다는 얘기였다.

지금은 그 때와 상황이 뒤집어졌지만 봉급생활자들의 볼 멘 소리는 여전할 성 싶다. 단지 환율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손해 보는 기분도 싫겠지만 실속도 없는 부자놀음 또한 반가울 리 없으니.

그러나 따지고 보면 GNP라는 게 환율 변동 없이 저만 홀로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정부가 무슨 정치적 목적을 갖고 인위적으로 환율을 올리고 내릴 시장 상황도 아니다. 그때와 달라진 제도 때문만이 아니라 이미 볼룸도 커지고 국경 없이 자금들이 오가는 판국에 당국이 개입할 여지라는 게 원천적으로 좁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 좀 비정상적으로 환율이 떨어져 걱정이 크긴 하지만 이론적으로만 보자면 환율이 떨어지는 자체는 그만큼 한국경제가 성장했다는 의미여야 하고 그로 인해 GNP가 오르는 것을 굳이 환율 때문 만이라고 사서 걱정할 일도 아니다.
지금은 저성장, 저물가, 저환율이 걱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저물가라는 대목이 걸린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을 한 상황에서도 한국사회는 지금 저물가 상태라는 거다.

부동산이 우리네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물가지수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탓이다. 물가 지표 설정 상의 중대한 오류다. 우리 삶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세계화는 무엇 하나 아귀 맞춘 정책 생산에 보탬 될 게 없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하나의 예시다.

갈팡질팡 안절부절 못하는 한국은행만큼이나 그걸 보는 이의 머리속도 뒤숭숭해 절로 횡설수설 두서없는 소리를 늘어놓게 되는 오늘이다.
 
홍승희 <편집국장>

이 시간 주요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