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호는 왔는데..위기의 한진重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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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업의 효시, '태생적 한계'로 쇠락
노사관계 개선, 수주증대 등 난제 산적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국회 청문회 참석을 앞두고 출국했다가 50여일만에 귀국해 10일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현재 극심한 침체의 늪에 빠져있는 한진중공업의 재도약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또 해외에서 수주 영업을 벌였다고는 하지만 정치권의 잇따른 귀국 및 청문회 출석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두달 가까이 잠행해온 조 회장의 향후 거취에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 '74년 영욕의 세월'..한진重 재도약할까 = 한진중공업은 한국 조선업의 시초라고 불린다.

한진중공업은 1937년 조선중공업㈜라는 이름으로 부산 영도에 설립됐다.

설립 이듬해인 1938년 국내 최초로 390t급 철강 화물선을 건조했고, 1945년에는 대한조선공사로 재출범한 뒤 1968년 11월 민영화를 거쳐 1969년 국내 최초로 철강어선 20척을 건조해 대만에 수출했다.

이후 1972년 국산 경비정인 '학생호'를 건조했고, 1974년에는 3만t급의 대형선박 6척을 미국 걸프사에 인도했다.

1977년에는 국내 최초로 석유시추선과 자동차 운반선을, 이듬해에는 화학제품 운반선을 수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대한조선공사가 현재 한진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90년.

한진중공업으로 간판을 바꿔 달은 뒤 1995년에는 동양 최초로 이중선체의 화물창 내벽에 방열재를 설치해 경제성과 안전성을 높인 '멤브레인'형 LNG선을 건조하는 데 성공했다. 국내 최초로 해저 광케이블선을 건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업계의 '종가'로 군림하던 한진중공업이 성장세를 이어가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국내 경쟁업체의 조선소 면적이 495만∼660만㎡(150만∼200만평)에 달하는데 비해 26만4000㎡(8만평)에 불과한 영도조선소 규모로는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에 역부족이었다.

한진중공업은 이 때문에 후발업체들이 세계 1∼2위 조선사로 쑥쑥 성장해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속병을 앓아야 했다.

이같은 한계를 극복하고자 댐 공법과 같은 신공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댐 공법이란 꼬리 부분을 뺀 나머지 부분은 도크에서 조립하고 바닷물 쪽(도크 밖)으로 삐져 나간 꼬리 부분과의 용접은 물속에 설치한 인공 구조물 안에서 실시하는 방식이다.

특허를 취득한 이 공법으로 한진중공업은 중소형 컨테이너선은 물론 8천TEU급 이상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만들어냈다.

또 숙원 사업이던 생산시설 확충을 위해 지난 2006년 필리핀 수비크만 경제자유구역내에 최신 첨단설비를 갖춘 수비크조선소 건설을 추진했다. 그 결과 불과 18개월만인 2007년 12월 대형조선소를 완공했고 이듬해 6월에 컨테이너선을 만들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등 빅 3가 신기술 개발 및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 등 선종 다양화에 매진하는 동안 한진중공업은 기술력이나 첨단 생산시설 확보에서 뒤쳐지면서 줄곧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여기에 지난해 2월 사측의 대규모 정리해고로 촉발된 노사 분규가 확대 일로로 치달으면서 이 여파로 이결국 한진중공업은 2008년 8월 18만t급 벌크선을 수주한 이래로 수주를 따내지 못했다. 무려 3년간 수주 실적이 전무한 것이다.

또 이전까지 수주 선종을 보더라도 LNG선, 쇄빙선 등 세계 조선시장에서 급부상하는 고부가가치 선종 수주는 빈약했고 드릴십, FPSO(부유식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 등 고가의 해양 플랜트 부문에서도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하는 등 시장의 변화를 따라잡는데 실패했다.

이같은 부진의 여파로 결국 지난 2008년 12월말 기준으로 148만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에 달하던 영도 조선소의 수주잔량은 올해 6월말 기준으로 12만CGT까지 곤두박질쳤다.

또 수빅 조선소도 올해 6월말 기준으로 수주잔량이 180만CGT를 기록했으나 2008년말(165CGT)과 비교하면 15만CGT만 늘었을 뿐이다.

연간 실적을 봐도 작년에 매출이 2조7천758억원으로 전년 대비 14.6% 줄었고, 영업이익은 1천932억원으로 58.1%나 감소했으며 당기순이익도 1천36억원 수지가 악화돼 517억원 손실을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조남호 회장이 대국문 호소문을 통해 한진중공업의 회생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밝힌 만큼 한진중공업은 우선 해외 수주 영업을 대거 강화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세계 조선시장에서 단기간에 재도약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한다는게 업계의 중론이다.

또 영도 조선소 정상화까지는 극도의 불신.대립 구도로 치달은 노사 관계 개선, 크레인 농성 해제, 청문회 참석 등 풀어야할 과제들이 산적해있다.

특히 한진중공업의 태생적 한계인 생산부지 부족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조 회장은 영도조선소는 좁은 부지에서도 생산가능한 특수선에 특화한다는 전략을 제시해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주목된다.

그러나 특수선만으로는 글로벌 조선업체로 생존을 유지하기 어렵고 결국 해외에 생산부지를 추가로 확보해야 하는데 이 경우 영도조선소 인력을 조정하는 문제가 대두할 공산이 커서 노사간 대립 구도가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점도 난제 중의 하나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 '스마트한 카리스마' 조남호 = 조남호 한진중공업[097230] 회장은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故) 조중훈 회장의 차남이다.

선친이 작고한 2002년 이후 한진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대한항공[003490], 한진중공업, 한진해운[117930], 메리츠 증권이 계열 분리되면서 조 회장은 한진중공업을 맡아 운영해왔다.

대한항공은 장남인 조양호 회장에게, 한진해운과 메리츠증권은 작고한 3남 조수호 회장과 4남 조정호 회장에게 각각 돌아갔다.

조남호 회장은 작년 2월 대규모 정리해고로 촉발된 노사 분규가 결국 크레인 장기 농성 및 희망버스 시위로 번져 국회에서 줄곧 청문회 출석요구를 받으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형제간 법적 분쟁이 도마위에 오르면서 언론의 조명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개인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스마트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하며 카리스마까지 갖췄지만 언론 등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만 형인 조양호 회장과 비슷할 뿐 다소 수줍음이 많은 형과는 여러모로 이질적인 성격인 셈이다.

이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조 회장은 10년 가까이 법적 분쟁을 벌여왔다.

조남호 회장은 4남인 조정호 메리츠금융 회장과 함께 선친 별세 직후인 2002년 말 부암장에 기념관을 건립키로 합의했는데도 장남인 조양호 회장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2008년 초 손해배상과 지분이전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 소송은 법원이 지난 1월31일 화해 권고안을 제시했으며, 양 측이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권고안이 최종 확정됐다.

지난 2005년에는 정석기업 주식 반환 소송을 제기했는데 결국 큰형이 주식을 돌려주면서 사건이 정리된 바 있다.

또 2006년에는 기내 면세품 수입대행 회사 문제로 동생들이 조양호 회장에게 60억원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1인당 6억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하면서 종결됐다.

일단 조남호 회장 앞에 도사리고 있는 선결 과제는 노사 관계 개선과 청문회 참석이다.

조 회장은 10일 대국민 호소문 발표를 통해 "국회의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밝힌 만큼 우선 오는 17일로 예정된 국회 한진중공업 청문회에 참석할 전망이다.

이와 함께 노사 관계 개선, 해외 수주, 기술 경쟁력 배양, 생산시설 확충 등 해결해야할 과제도 산적한 상황이다.

한진중공업 관계자는 "조 회장이 호소문을 통해 회사 회생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밝힌 만큼 분골쇄신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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