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은 왜 성범죄에 관대할까
법원은 왜 성범죄에 관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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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8살짜리 초등학생이 성적수치심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아동성추행에 무죄판결을 내렸다는 기사가 떴다. 그간의 사례로 볼 때 이런 판결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런 판결을 내린 판사가 과연 자녀를 기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전통적으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공손하도록 가르침을 받으며 큰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에게 낯선 어른들을 경계하도록 가르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그 초등학생 또래인 필자의 늦둥이 조카는 혼자서는 무서워서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으려 한다. 그 또래 아이들이 엘리베이터에 남자 어른이 있으면 그냥 보내고 다음번을 기다린다는 소리도 들린다. 딸을 기르는 엄마들은 세상이 험해서 아이 혼자 바깥에 나가는 것조차 가슴이 조마조마하다고 하소연을 하는 지경이다.

그런데 그 많은 아이들의 아빠들은 과연 그런 사정을 알까도 궁금하다. 어쩌면 저런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은 자식을 엄마 혼자 기르는 줄 아는 이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자식들이 사는 세상을 고민조차 못하고 일에 쫒기고 정치에 쫒기며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법전이나 달달 외워 사법시험에 합격한, 세상물정 모르는 판사들이 넘쳐나서 그런 판결들이 줄지어 나오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사람이 사는 세상의 복잡 미묘한 현상들을 제대로 가늠해 볼만큼 사유의 시간을 제대로 가지기도 어려웠을 그들이다.

사법시험에만 합격하면 이미 세상은 그들의 적잖은 기득권을 인정하고 본다. 그러니 젊은 나이에 외골수로 시험공부만 하던 그들이 갑자기 세상으로부터 큰 능력이 있는 양 기대를 받고 그 단계에서 뒤늦게나마 세상을 제대로 공부하게 될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성범죄가 아니더라도 종종 법관들의 판결을 보면 도대체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런 그들을 믿고 큰 기대를 보인다. 갈수록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갈 법하다. 그러니 8살짜리 아이에게 어른과 같은 상황대처 능력을 주문할 배짱이 생길 터다.

이런 현상은 꼭 법관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을 아이답게 바라보지 못하고 어른의 욕망에 맞춰서만 기대하고 우리 사회는 지금 총체적으로 아이들을 학대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 다 사주는 데 무슨 학대냐고 반문할 이도 있겠다. 하지만 아이가 놀이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개척하는 창의적 아이로 자라도록 지켜주지 못하면 그게 아동 학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여러 면에서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성범죄의 위협 뿐만은 아니다. 열 살도 안 된 아이에게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학원 뺑뺑이를 돌게 하며 공부 압력을 넣는 부모도 아이를 학대하는 일이건만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향한 어른들의 그런 폭력적 요구와 기대를 오히려 미화하고 칭송하기까지 한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뛰어 놀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권리를 인정해주는 곳도, 놀 공간도 찾아보기 어렵다. 흙장난을 하고 주변 사물을 활용해 소꿉장난도 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 놀이 속에서 아이들은 창의력이 커간다. 그러나 이제는 공간 대신 유아의 지능을 향상시킨다며 등장한 상업적 놀이공간이 그 자리를 메워갈 뿐이다.

아이를 자연과 분리시키고 주입식 학습만 강요하는 것도 아동학대임을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가 상황대처를 제대로 못했으니 가해 어른의 책임이 없다는 사회에서 이건 너무 큰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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