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위험한 은행업 개혁 논의
[홍승희 칼럼] 위험한 은행업 개혁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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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고 있는 은행업 개혁 논의를 보면서 문득 필자가 재무부(기재부)를 취재하던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보험 쪽 업무를 해본 적 없다 보험국장을 막 맡았던 이가 말하길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로부터 받은 보험정책 관련 브리핑자료를 통해 업무를 온전히 파악했다고.

자신이 담당할 분야 기업으로부터 받은 현안 브리핑자료에 일말의 의구심도 없이 매우 객관적 자료라며 전적으로 의존하던 그 국장의 당당한 태도에 내심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기업들이 관련 자료를 내놓을 때는 97~99% 정도의 객관적 자료를 담을 것이지만 그 가운데 자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1~2%의 논리가 얼마나 큰 함정이 될 것인지 그 위험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원래 로비스트들도 단 한 두 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거의 대부분은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논리를 펼친다고 한다. 그런 단순한 사실이 종종 권력에 취한 이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고 만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은행업 개혁 이슈 가운데서도 가장 논란이 될 부분은 금산분리 원칙의 완화로 보인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사이에 장벽을 친 가장 큰 이유는 균형적 자원 배분을 통한 금융시장 안정일 것이다.

즉, 금융자원의 '공정한' 분배를 위해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를 막고자 해서 마련되고 근 40년간 유지되어온 원칙이 지금 재검토 대상에 오른 것이다. ‘은행은 공공재’라는 대통령의 한마디로 촉발된 은행업 개혁 논의가 그 공공성에 반하는 방향으로 치달아가는 모양새다.

한국이 유독 산업자본의 금융산업 진입장벽이 높은 것은 맞다. 진입장벽이 매우 낮은 미국이나 영국은 물론 어지간히 장벽을 세워놓은 유럽대륙 내 독일, 프랑스 등의 국가들에 비해서도 한국의 장벽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자본 성장의 역사나 산업의 역사가 각기 다른데 기인하는 것으로, 무작정 모방하고 답습하는 것으로는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

금융자본의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영국이나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물론 유럽대륙으로부터 미국으로 진출해 정착한 금융자본들로 인해 이후 금융의 메카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는 미국은 워낙 거대한 금융자본의 규모로 인해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굳이 높은 장벽을 칠 필요가 없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경우는 산업자본이 스스로 금융산업을 일으키는 데 나섰던 역사가 있기에 공공성을 중시하면서도 한국보다는 진입장벽이 낮다고 한다. 그러나 그 유럽은 정부가 앞장서서 은행의 규모를 키워주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한국은 개발경제시절 정부가 도입한 외자의 분배권을 가지면서 집중 육성한 산업자본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내자의 분배권을 은행에 몰아줬고, 그 은행들에 대한 산업자본의 지배를 규제해왔다.

이를 법적, 제도적으로 규제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지만 그 이전부터 정부가 통제를 해왔고 그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재벌체제를 갖고 있는 한국에서 산업자본은 꾸준히 금융산업에 진출하기를 꿈꿔왔고 신군부시절 말미에는 대규모로 금융사들을 허가하면서 직간접적인 산업자본의 금융산업 진출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때 한국의 자본총량에 비해 지나치게 대량으로 허가됐던 금융사들 대부분은 이후 여러 번의 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져 지금의 금융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

여전히 증권사나 보험사들과 달리 은행은 산업자본의 직접 지배로부터는 보호돼 왔고, 이는 은행의 공공성을 웬만큼 담보해줬다.

그러나 지금 그 원칙이 다시 훼손 위기를 맞고 있다.

은행업 개혁을 논의하는 주체들은 메가뱅크를 주장하며 29개 은행(당시에도 근간은 6개 시중은행)을 현재의 5개 대형은행과 소수 지방은행 체제로 통합시켰던 과거를 묻고 이제는 독과점의 폐해를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금산분리원칙을 완화시키겠다고 나서고 있다.

노태우 정권 말기의 터무니없는 금융사 엔트리 대량 확대의 전철을 다시 밟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미국식이면 무조건 옳다는 신념이 매우 뚜렷해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경제 체급 자체가 다른 미국 흉내 내기는 마치 황새를 쫓아가는 뱁새의 버둥거림처럼 그 조바심이 위태롭기 그지없다.

황새에게는 황새의 걸음이 있고 뱁새에게는 뱁새의 걸음이 있음을 잊을 때 위기 한방에 훅하고 갈 수 있었던 기억을 벌써 잊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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