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실리콘밸리식 인사 혁신' 환상에서 벗어나야 
[기자수첩] '실리콘밸리식 인사 혁신' 환상에서 벗어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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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오세정 기자] 올해 재계 연말 인사에서는 이른바 '실리콘밸리식 인사 문화'가 주목을 받았다. '실리콘밸리식'은 구글, 애플 등 글로벌 ICT 회사들의 조직 문화를 일컫는 말로, 연공서열 파괴, 능력·성과 중심의 수평적 조직 문화로 설명할 수 있다. 재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세계적 대유행(펜데믹), 디지털 대전환의 격변기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조직 혁신의 카드로 실리콘밸리식 인사 제도를 꺼내든 것이다.

특히 기업들은 성과 중심의 수평적 조직 문화를 표방하며 잇따라 직급을 없애거나 통합하는 등 '직급 파괴'에 나섰다. 먼저 지난달 29일 삼성전자는 '미래지향 인사제도 혁신안'을 발표하며 부사장·전무 직급을 통합해 부사장 이하 직급 체계를 부사장-상무 2단계로 단순화한다고 밝혔다. 내년부터는 약 10년의 '직급별 표준 체류 기간'도 폐지한다.

이달 23일에는 CJ가 상무대우부터 사장까지 6단계로 운영되던 임원 직급을 내년 1월부터 '경영 리더'로 통합하기로 했다. 벤처·스타트업으로 출발하지 않은 기존 대기업 그룹 가운데 사장급 이하 임원들을 단일 직급으로 운용하는 것은 CJ가 처음이다. 앞서 2000년에는 국내 최초로 사내에서 '님' 호칭을 도입하기도 했다.

SK그룹은 지난 2019년 이미 임원 직급을 폐지하는 임원 혁신안을 전면 시행해 기존 부사장, 전무, 상무로 구분됐던 임원 직급을 '부사장'으로 통일했다. 아울러 계열사마다 직원들의 호칭을 '매니저', 'PL(프로젝트리더)' 등으로 단순화했다. LG그룹 역시 임원 이하 직원의 직급을 책임·선임 등으로 축소했다.

이들 기업은 직위 체계 및 호칭 개편을 통해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조성하고, 근속연수보다 성과 중심의 보상으로 우수 인재의 역량을 끌어낸다는 방침이다. 기업들은 직급 파괴를 통해 의사결정 속도가 빨라지고, 조직의 창의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실제 그럴까. 수평적인 조직문화가 정착됐다고 알려진 국내 IT 기업들의 행보를 주목할 만하다. 네이버는 2019년 2년 만에 임원 직급을 부활시켰고, 카카오는 올해 창사 이후 처음으로 임원 직급을 만들었다. 잦은 조직개편, 직장 내 괴롭힘, 보상 기준 논란 등이 불거진 데 따른 결정이었다. 이들 기업은 규모가 커지는 만큼 책임경영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직급 파괴 행렬에 동참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기업 사례도 일부 있는 것이다. 책임자가 명확지 않아 효율이 떨어지고, 업무 혼선이 생기는 등 문제로 보상만 챙기고 책임은 미루는 '리더'들이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에 충분한 지점이다. 일각에서는 기업들의 직급 파괴는 임원 수를 줄이기 위한 승진 수요 억제, 성과주의는 조직 슬림화를 위한 성과 관리 강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지나친 성과주의는 '무한 경쟁'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 '실리콘밸리식'이라는 환상 속에 숨겨진 이면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실리콘밸리 기업 문화는 대체로 불필요한 관리는 최소화되며 자유와 책임은 극대화되는, 철저한 성과와 능력 중심 문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과를 입증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무한 경쟁의 시장형 성과주의다. 수평적 조직을 표방하지만 연봉은 극단으로 수직적이다.  

구글에서 근무하는 김은주 수석디자이너는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회사는 직원들이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들어준다"면서 "다만 자율엔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이 따른다, 그 바닥(전제)은 뭐냐면 '그러니까 네 몸값을 해'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업 인사 제도나 조직 문화에 정답은 없다. 그리고 당장 평가를 하기에도 시기상조임은 분명하다. 다만 단순히 직급을 통합하고 조직 체계와 제도를 바꾼다고 인사 혁신이 이뤄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연공서열·직급·호칭 파괴 등 기업의 인사 혁신이 '실리콘밸리식 문화'라는 환상에 빠져 '혁신을 위한 혁신', '습관성 혁신'이 되지 않으려면 그 목적과 지향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혁신인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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