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문재인-바이든이 함께 그린 그림
[홍승희 칼럼] 문재인-바이든이 함께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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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백신 문제를 거론하자 처음 바이든 대통령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백신 대량 생산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빠르게 공급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이자 표정이 금새 풀렸다고 전해진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 성과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늘 그랬듯 비판하기 바빴다. 44조 조공외교라는 둥 미국산 백신을 겨우 55만 회분 받아온 게 다’라는 둥 그저 폄훼하기에만 몰두했을 뿐이다.

그러나 양국 정상회담은 그야말로 정상회담다운 큰 그림을 얘기하는 자리였던 듯하다. 언론에서는 앞선 미일 정상회담과의 비교에서 고작 식사 메뉴가 뭐고 면담 시간이 얼마라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그보다는 미국이 원하는 큰 그림에 대한 이해도에서 한일 간에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보도는 없어서 아쉬웠다.

스가 총리가 일본이 받을 백신에 관심이 머물렀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전략에 백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촉구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그런 한국의 제안을 바로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필자는 바둑을 잘 모르지만 초반 포석을 잘 두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는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정상외교는 바둑의 포석을 까는 것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리고 바이든 대통령은 미 의회 외교위원장 출신답게 전체 판을 보는 식견과 상대의 의도를 언어를 넘어서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줬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의 채찍 대신 당근을 들겠다고 제안한 것이고 이는 결국 한국이 우리의 방식으로 미국의 동맹으로 곁에 서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밝힌 셈이다. 그렇기에 미국이 한국을 억지로 쿼드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고 대만 문제에 대해서도 단지 자유로운 통행권 보장 필요성만으로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배려했다.

어차피 대통령이 혹은 대한민국 정부가 돈을 내주는 것도 아니고 한국의 기업들이 그들의 필요 때문에 미국에 투자할 돈으로 한국은 생색을 내고 미국은 이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제스처로 55만 명분의 미국산 백신-결과는 100만 명분이 왔지만-을 무상지원하겠다고 한 것이지 설마 55만 명 백신 값으로 44조원을 줬다는 식은 정치적 수사로서도 유치했다. 그나마도 일본에는 그만큼의 무상지원도 없었는데 일본과 비교해가며 회담결과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무리 봐도 적합하지 못했다.

백신을 직접적으로 지원 받는 것보다 한국이 백신 허브로 자리잡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생산된 백신을 도입하는 것이야 개별 기업들과 협의할 일이지 그걸 정상회담의 주제로 삼는 것은 넌센스다. 설마 야권에서 스가가 그랬으니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한다는 주문은 아닐 터이니 이 문제는 그저 아쉬움을 표현하는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넘어가자.

이제 한미 관계는 한국이 미국의 그림자를 밟던 과거와 달리 미국 곁에 당당히 서도록 변화했다. 미국이 그리는 세계전략에 한국이 충고를 덧붙임으로써 그걸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이었다.

그런데 이후 한국에서는 한 지방법원 판사의 어처구니없는 판결문이 나와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다. 문제가 된 판결문의 내용은 현재 격상되어가고 있는 한국 외교의 실상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고 한국은 일본이 싫어하는 일 하면 한일관계가 풀리지 않고 그러면 미국도 싫어한다는 식이다.

판사 개인의 법 해석까지는 우리 사회의 법적, 구조적으로 볼 때 뭐라 하기는 힘들겠지만 그 해석이 하필 일본 극우들의 주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법이 아무리 지난 선례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 해도 식민지 역사의 후유증에 대한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들의 주체적, 선도적 대응에 제동을 거는 모양새여서 씁쓸하다.

이는 마치 망한 명나라에 대한 소국의 충성심을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전국민에게 세뇌시키던 조선 사대부들의 사대논리가 부활한 것만 같다. 우리나라를 중심에 두는 대신 상대국인 일본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의 뿌리가 참 깊다는 생각도 든다. 그로 인해 모처럼 한국 정부가 획득한 외교적 이점을 부정하는 한국 엘리트 기득권층의 비틀린 모습 같아 더더욱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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