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명' '셀프감사' '찍어내기' 2013 유행어

2013-10-24     홍승희

현 정부가 홍보의 귀재 집단이어서인지 유독 올해 유행어들을 양산한다. 물론 정부가 만들어낸 용어라기보다는 언론이 현실정치를 묘사하느라 생산해낸 것들이기는 하지만. 요즘 시끄럽기는 국정원 수사로 촉발된 검찰 내부 갈등을 뜻하는 ‘항명’이지만 그보다 앞서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인 공약사업의 하나인 복지정책 후퇴에 책임지겠다며 사표를 낸 진영 전 복지부장관의 행위도 항명으로 낙인찍었다.

도대체 항명이라는 말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쓰이는 사회가 과연 ‘민주사회’인지 의아하다. 정권적 결정에 뜻이 다르면 사표를 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잘못된 지시는 거부하는 것이 올바른 공직자의 태도 아닌가. 그로 인해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이라는 사건의 본체는 희미해져가고 있으니 정권 입장에서는 참으로 바람직한 것인가.
 
상명하복이라는 권위주의적 가치에 지나치게 충실해 김재규 정보부장의 잘못된 지시에 복종하다 대통령 암살범이 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중앙정보부 인물들의 행동이 옳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라면 ‘항명’은 죄가 될 테지만 그저 상식에 충실한 일반 국민들로서는 그걸 옳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역시 대한민국은 여전히 권위주의 사회임을 재확인시키는 소동들이다.
 
인터넷에는 진보와 보수의 의견들이 저마다 ‘말’들을 쏟아낸다. 그 가운데 보수 칼럼들을 보면 ‘상명하복은 사라지고 항명만 남았다’며 박근혜 정부를 향해 항명을 엄벌하라고 추상같은 호령을 한다.
그들에게 ‘항명’의 범주는 꽤 넓다. 국정원 대선 개입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박근혜 정부와 보수세력을 불편하게 만든 공무원들은 죄다 ‘항명’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죄다 적발해 싹을 잘라내라고 서슬 퍼런 주문을 토해낸다.
 
그런 이들로 인해 국정원의 불법은 뒤로 밀리고 ‘항명’만이 유행어로 동동 떠다닌다. 사회 구석구석 상명하복만 있는 사회에서 창조는 무슨 창조가 나오겠는가.
군대 제대를 해도 군대 같은 일터에서 악몽을 꾸는 사회, 하다못해 창의력이 재산이어야 할 연예인들마저 ‘항명’으로 활동을 접는 일이 벌어지는 웃기는 사회에서 ‘창조’라는 말은 참 엉뚱한 조합이다. 너무 오래 군사정권이 집권했던 후유증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휘두르고 있기 때문인가 싶다.
 
그런가 하면 국정감사나 감사원 감사 대상이어야 할 만한 사건들을 정부기관들, 그 중에서도 소위 권력기관으로 분류되는 곳에 관해서는 죄다 ‘자체 감사’하도록 함으로써 셀프감사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원인이 됐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집단을 내부 개혁하고 자체 감사하라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아무래도 문제는 덮고 넘어가되 정치적으로 걸러내기를 하라는 의도로 읽힐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디어 표제어들이 유행을 따르게 되지 않나 싶다.
‘항명’의 싹을 도륙하라는 보수세력의 요구에 참 충실하게 따르는 듯하다. 누가 이끌고 누가 끌려가는 것인지는 아리송하지만.
 
거기 더해 전 정부에서 임명된 공기업 CEO들을 조기 퇴진시키려다 거부당하자 검찰과 국세청 등이 동원되어 강제 퇴진시키는 일이 잇따르며 ‘찍어내기’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필자 개인적으로 조기 퇴진 요구를 받는 이들을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 전의 여러 알려진 행태나 전적으로 보아 변호할 마음은 전혀 없다. 다만 이런 유행어가 탄생하는 정치는 아무래도 껄끄럽다. 임기라는 게 있는 자리들인데 그렇게 정권 입맛대로 ‘찍어내기’를 하면서 ‘원칙’과 ‘신뢰’를 얘기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고.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국군보안사 등이 각각 올리는 정보들을 놓고 어떤 정보를 우선 선택하느냐로 각 기관의 권력 서열이 갈리곤 했다. 그렇게 각 권력기관들을 인형극의 인형 조율하듯 조율함으로써 장기 독재가 가능했었다.
그렇게 권력기관들을 기술적으로 조율하던 박정희는 결국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됐으니 역사의 끝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매사에 결과도 과정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그렇게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