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은행장 대행
3-은행장 대행
  • 서울금융신문사
  • 승인 2003.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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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은행들은 스스로 ‘기업’이라는 사실을 너무 자주 잊는 것 같다. 은행장들이‘상업적인 판단’을 기초로 경영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 이런 사건은 은행장 선임과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은행장이 실력이 아닌 서열에 따라, 아니면 기존 은행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하거나 혹은 정치 실력자인 누구의 친구이기 때문에 선임되는 풍토에서는 정상적인 은행경영이 불가능할 것이다.”
- 한보 사건이 터진 후 한 외국은행 서울지점장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소감



행장과 부 행장, 그리고 여신담당 상무가 없는 임원회의는 차라리 초상집이요 패잔병들의 모임이었다.
동우그룹의 부도와 법정관리가 확정되고 그룹 총수와 은행장과 부 행장이 업무상 배임과 횡령죄로 구속된 이후 처음 열린 임원회의였다.

실제로 초상집일 수밖에 없는 것이 행장의 심복이었던 여신담당 박 상무는 검찰의 일차 밤샘 조사를 받고 일시 귀가 조치가 내려진 직후 잠적 3일만에 분당의 한 러브호텔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자살이었다. 마음이 여리디 여린 박 상무로서는 도저히 이번 사태를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으리라. 박 상무의 비극은 장행장의 고등학교와 대학 후배로 선배의 총애를 받았다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죄라면 임원 승진이 입행 동기에 비해 몇 년 빨랐던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평소에도 임원답지 않게 워낙 몸을 굽히며 처신해온 관계로 임원 승진이 다소 빠른 것을 가지고 행내에서 시비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관계로 그의 자살은 더욱 충격이었고 비극이었다. 박 상무는 그저 상사를 잘 만난 소심한 샐러리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사건은 그의 여린 신경 밧줄로는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것이었으리라.

평일은 눈을 아래로 내리 깔고 이를 꽉 다물었다. 아까부터 평소에는 임원회의에 들어오지도 않던 유 감사가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은행은 비상 경영체제로 들어 갈 수밖에 없고, 누구라도 행장 역할을 임시로라도 맡아야 할 것 같은데... 제 생각에는 그래도 연장자인 김 평일상무가 당분간 행장 대행을 하는 것이.... 이미 감독 당국에도 그렇게 보고했고 또 그래도 좋다는 내락도 있으니...”
평일은 감사의 말에 흠칫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명 남지도 않은 임원들은 감사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저마다 외면을 하고 있었다.
‘날더러 행장 대행을 하라구. 덤터기를 쓰라는 말이지. 이 친구들이 사전에 입을 맞췄구만. 이미 감독원에도 그렇게 보고하고 내락을 받았다는 말이지. 당사자인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누구 맘대로. 아예 날 핫바지 저고리 취급을 하누만. 당신들의 잔치는 끝나고 날더러 이제 뒷설거지를 하라 이거지.’

평일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쩝’하고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모두들 흘깃 평일을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정부 당국의 대변인임을 자임하고 있는 재무부 국장 출신인 유 감사는 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회의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자, 그러면 모두 그렇게 알고 빨리 사태를 정리합시다.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심기일전하고 평상심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은행을 살리는 길이요.”
감사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중얼중얼하며 결론을 내리자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평일을 향해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망해가는 은행의 행장 대행이라...’
평일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길 기다리며 다 식은 커피 잔을 기울였다.

유 감사가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혼잣말하듯 한마디 던졌다.
“김 상무, 미안하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어 결론을 이렇게 내릴 수밖에 없었오.”

“아닙니다. 차라리 고맙습니다. 그래도 행장은 아니라도 행장 대행이라도 해보고 40년 은행원 생활을 마감할 수 있으니”
이번에는 유 감사가 입맛을 ‘쩝’하고 다시며 발걸음을 돌렸다.

행내에는 이미 정부가 대성은행에 2조원 넘는 공적 자금을 투입하고 다른 은행에 합병을 시키기로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제 은행들이 뭉치지 않으면 살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부실이 워낙 많은 대성은행은 다른 어떤 은행과 합치든 합병당하는 처지에 놓일 것이 분명했다.

감사는 이미 감독원의 그런 방침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호시탐탐 행장 자리를 노리던 감사가 행장 대행자리나마 그렇게 선선히 평일에게 인심 쓸 리 없었을 것이다.

‘날더러 상주가 되라는 말이지.’
평일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대세를 거스를 수야 없겠지. 하지만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이게 40년 은행 생활의 끝인가. 합병 당하기까지 남은 임기 1년을 무사히 마칠 수나 있을까.’
평일은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응접세트에 놓여있는 담배를 한가치 뽑아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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