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과 엘리베이터
계단과 엘리베이터
  • 홍승희
  • 승인 2004.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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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가 설치될만한 건물도 흔치 않던 60년대에 대기업주이면서 정치적 실세이기도 했던 김모씨의 지상 3층 가정집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는 소문이 나돌며 시중의 화제가 됐던 적이 있다.

중고등학생들 사이의 소문만을 기억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지금에 와서 그 당시 소문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빠르고 쉽게 층간을 오르내릴 수 있는 엘리베이터라는 기구에 관심이 증폭됐던 것은 분명하다.

돌아보면 그 당시도 지금 못지않게 매사에 고속을 지향하던 시절이었다. 고속성장을 지향하는 국가적 목표에 발맞추듯 고속도로, 고속버스가 등장하고 지금도 한국인들이 몰려 다니는 해외 관광지에서 한국인들을 대변하는 표현이 된 ‘빨리 빨리’ 속성이 자리잡기 시작한 때였다.


절대빈곤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 못지않게 낙후된 국가경제를 빠르게 성장시키려는 사회적 열망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전 사회를 그런 분위기로 몰아갔던 당시 집권층의 집요한 노력이 큰 몫 했겠지만 개개인들의 열망 또한 적었다고 말할 근거는 전혀 없다.

지금도 초고속 열차가 개통되고 무엇이든 ‘더 빠르게’에 매달리는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느림의 미학’이 거론되기도 하는 걸 보면 차츰 ‘빨리 빨리’에 대한 반동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봐도 무리는 아닐 성 싶다.

우리 사회 전체로 봐서도 이제는 고속성장 시대는 서서히 마감돼 가고 저속성장 시대로의 불가피한 전환에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고속에의 갈망이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습관화된 듯하다.

사회 전반을 볼 때는 저속성장의 불가피성을 수용하는 이들조차 개개인의 삶은 여전히 속도를 구가하고자 열망한다. 더 빠른 부의 축적, 남보다 앞선 승진을 위해 옆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여전히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앞서 나가는 엘리베이터족과 뒤처지는 계단족의 삶의 간격은 점점 더 벌어져만 간다. 소득은 자산규모에 단순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제곱승으로 벌어진다. 그래서 단순 봉급생활자와 자산소득을 가진 자들 간의 소득격차가 현저히 커지며 웬만한 급여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봉급생활자들 간의 급여차가 갈수록 벌여져 억대 연봉자들이 다수 생겨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여전히 기초생계비에 훨씬 못미치는 소득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줄어들 줄 모른다. 노동계급 사이에서도 대규모 사업장의 조직노동자들과 중소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격차는 매우 크게 벌어진 형편이다.

근래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는 그래서 단순한 분배형평성의 문제를 넘어선다. 직업안정성 측면에서도 비정규직의 급격한 증가는 사회적 불안요소가 될 충분한 소지를 안고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대다수가 생계급에 못미치는 저임금 층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라는 더 근본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과거에도 직종별 임금격차는 존재했고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근래 들어서는 첨단산업과 사양산업 간의 임금격차가 불가피한 일면도 있긴 하다.

그러나 같은 직장내에서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어 심각한 차별을 자아낸다면 그 갈등의 깊이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제 노동운동의 주요 명제의 하나였던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현실성 없는 단순한 ‘사회적 이상’이 돼가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들의 조직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 틈바구니를 벌려 노노갈등을 일으키려는 자본의 움직임은 자연스럽다.

사회적 평등을 위해 싸워 얻은 결실을 또다시 소수가 독점하는 양상을 단순히 역사의 반복으로만 치부해도 좋을 지는 노동하는 국민 모두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몫일 듯하다.

70년대에도 이미 성장과 분배의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일었다. 그리고 소위 파이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당시 그같은 아젠다는 실상 정부 쪽에서 선점하고 논란을 주도한 측면도 있다.

최소한의 생계비와 인권 요구를 거창하게 분배욕구로 치환시킨 것은 정부와 관변단체였다. 이제는 누가 오늘의 아젠다를 선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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