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시장의 '불공정 게임'
퇴직연금시장의 '불공정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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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김기덕 기자] "대기업 계열금융사들이 득실거리는 현 시장에서는 더이상 설 자리가 없네요. 시장파이는 점점 커지고 있는데, 사업확장은 커녕 현상유지에도 급급한 실정입니다." 한 중소형증권사 퇴직연금 담당자의 한숨섞인 탄식이다.

퇴직연금시장이 갈수록 '레드오션'으로 변질되고 있다. 시장 사업자들간 공정한 경쟁은 오간데 없이 대기업들이 같은 그룹 내 금융회사에 퇴직연금 몰아주기가 관행처럼 퍼지고 있고, 금융사간 과열 경쟁으로 적자출혈도 감수해야 하는 치킨게임으로 치닫고 있다.

올해 말 기존 퇴직보험·신탁제도 종결로 퇴직연금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팽창될 것이 기대되는 가운데, 금융사들이 차세대 '먹을거리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 도입 첫해인 2005년 말 163억원이던 퇴직연금 적립금은 2007년 말 2조 7550억원, 2009년 말 14조 248억원에 이어 지난 2월 말 15조원을 넘어서며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올 연말까지는 25~30조원 규모로 커질 전망이다.

이에 증권사들은 조직개편을 통해 퇴직연금 전담인력을 일선에 배치하며 '고객 끌어들이기'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같은 조직확대가 모든 사업자에게 고르게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룹 차원의 지원을 받고 있는 후발 중소형 증권사들은 기존 퇴직연금팀을 본부로 격상시키며 사세를 확장하고 있고, 이미 자리를 선점한 대형증권사들은 퇴직연금본부를 확대개편하고 인력을 확충하는 등 전열정비에 분주한 모습이다.

반면, '블루오션'으로 칭송(?)받았던 퇴직연금시장에 발을 들여논 독자적인 증권사들은 퇴직연금팀이 축소되거나 다른 부서와 합쳐지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동일한 라인에서 같은 속도로 출발한 퇴직연금사업이지만, 대기업 금융계열사들에 비해 현저하게 뒤처지게 된 것이다.

그룹계열사가 아닌 증권사 한 퇴직연금담당 임원은 "계열금융사들에게 적립금을 몰아주려고, 그룹사 차원사에서 모든 협력업체들에게 공문을 보낸 걸로 알고 있다"며 "은행에서 '꺽기'를 무기로 중소기업체들을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 '대어급'기업들을 계열금융사들이 독식해 설 자리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실제로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2월말 현재 대기업계열 금융회사 15곳의 퇴직연금 5조 1532억원 중 계열사들로부터 유치한 금액은 무려 2조5034억원으로 48.5%나 차지했다. 특히, 하이투자증권(98.5%), 한화손보(80.6%), 삼성생명(64.2%), HMC투자증권(60.2%) 등은 계열사 지원이 막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나친 과열경쟁도 문제다. 금융회사의 퇴직연금 운용수익은 보통 4%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사업자 입찰과정을 보면 연 7~8%의 고금리 원금보장형 상품을 제시하며 출혈경쟁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올 초부터 금융당국도 과열경쟁을 경고해 왔지만, 자본시장통합법 자체가 퇴직연금 시장을 둘러싼 금융업계 내 고금리 출혈 경쟁을 부추킨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시장법은 신탁재산을 해당 금융사 혹은 금융사와 이해관계에 있는 자산에 투자하는 것을 '불건전 영업행위'로 명백히 금지하고 있지만,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에 따른 특정금전신탁으로 원리금 보장이 필요한 경우는 예외로 두고 있다. 즉, 자사 정기예금이나 주가연계증권(ELS)을 퇴직연금에 편입시키는 건 원칙적으로 '불건전 영업행위'지만 당국이 예외 규정으로 이를 허용한 것이다.

금융당국은 부랴부랴 감독 및 제재 강화를 위해 자사 상품 편입을 금지하는 제도개선안을 추진하고, 현장 검사를 통한 기획검사도 불사하겠다고 나섰지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퇴직연금시장은 오는 2020년에는 현재보다 10배 수준인 150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퇴직연금시장이 진정한 자본시장의 '총아'로 거듭나기 위해 금융사와 금융당국의 시장건전성을 위한 절실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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