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목적 그리고 대상
원칙과 목적 그리고 대상
  • 홍승희
  • 승인 2004.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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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세청이 환란 상황에서 신탁투자 손실액을 은행계정에서 보전해주고 금융기관 손실로 처리한 문제를 들춰내 부당한 회계처리라는 이유로 국민은행에 1천3백억원에 달하는 법인세를 추징하겠다고 나섰다.

국민은행 측은 일단 추징세금은 납부하겠지만 국세심판청구를 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 건은 물론 국민은행에만 해당될 일이 아닐 것이다. 당시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사실상 전금융권이 마찬가지였으니 다른 금융기관들도 이 사태의 추이에 관심을 가질 터이다.

이번 사태를 보며 우리 사회가 그 당시의 환란 상황을 너무 쉽게 벗어나 그 위기극복 과정으로부터 배운 것이 너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도 한다. 당시의 상황은 그야말로 국가부도를 눈앞에 두고 전국민이 아기들 돌반지까지 내놓으며 금모으기에 나섰던 그런 위기상황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 현실이 아니었던가 싶을 정도다.

물론 당시의 위기는 생산활동이 부진했던 것도 아니었으니 한국경제의 총체적 부실로 인해 발생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난이라고 부를만한 위기상황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특히나 당시 금융부문은 그 어느 부문보다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자칫 금융시스템 자체가 붕괴될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정부와 금융권을 신뢰함으로 인해 다른 국가에서와 같은 대규모 예금인출사태 같은 것이 발생하지도 않았고 국민적인 상황극복 의지는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듯 해외로부터의 자금수혈도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덕분에 예상보다 빠른 극복이 가능했다.

정부와 금융기관들이 그 때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다면 상황수습은 몇배로 어려워졌을 것이다. 회복되는 데 걸리는 시간도 그만큼 길어졌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국민들은 분명 그 당시를 국가적 위기상황으로 인식하고 전란 중에 지휘부를 믿고 전장에 뛰어드는 병사들 같은 비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분명 전쟁에 준하는 상황으로 인식한 것이다.

전시상황에서 법과 제도의 운용에는 그야말로 비상수단이 쓰일 수 있어야 위기돌파가 가능하다. 그리고 금융기관들이 그런 비상수단을 사용함으로 해서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방지하고 빠른 시일내에 국가적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환란에 벗어났다고 당시의 상황적 인식과 판단을 무시하고 평상시의 원칙만을 강조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평상시와 전시 상황에서 적용돼야 할 원칙은 똑같을 수 없다. 금융시스템의 붕괴는 경제 전반의 붕괴로, 결국은 사회 전반의 붕괴로 이어지는 위험천만한 사태다. 그걸 막기 위한 비상조치에 사실상 국민적 공감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국세청이 이제 새삼 그 상황에 평상시의 원칙이라는 잣대를 들이댔다.

원칙은 지켜져야 옳다. 그러나 그 원칙은 지키고자 하는 실체가 존재할 때 따라서 존재하는 것이다. 원칙을 위해 사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 원칙이 있다는 것은 극히 상식적인 얘기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종종 그 상식을 잊고 원칙을 위한 원칙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의사들은 약물의 남용이 인간의 면역체계를 약화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건 건강한 상태에서 일시적 질병이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위급한 환자의 경우 투여할 수 있는 모든 약물을 투입하면서라도 일단은 위기를 넘기도록 조치한다. 그래서 대개 위기를 넘긴 환자들의 경우 한동안 그 과도하게 투여된 약물의 후유증을 겪게 되지만 그렇다고 의사의 처방을 과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후유증조차 겪을 일 없이 환자는 세상을 떠났을 테니까 당연한 일이다.

환란 당시의 상황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당연히 평상시라면 쓰지 않을 극약처방이라도 사용해서 국가 기간시스템의 붕괴는 방지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고도 적절한 처방이다. 따라서 그 이후 회생되고 나서 일정 정도 후유증이 발생하더라도 당시의 극약처방을 잘못된 것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전투 중의 특수한 행위를 평화시의 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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