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익장의 진정한 효용
노익장의 진정한 효용
  • 홍승희
  • 승인 2004.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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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치권에서는 공천물갈이를 주장하는 비교적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불출마선언이란 것이 줄을 잇고 있다. 이와는 사정이 다소 다르지만 금융권에서는 올해 주총을 기점으로 상당수의 고령자들이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나이 70을 눈앞에 둔 몇몇 은행장들이 구체적으로 거명되고 있다. 어디까지나 설(說)에 불과하지만 작금의 사회분위기에 비춰볼 때 전언이 사실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성싶다.

실상 오륙도에서 시작돼 사오정, 삼팔선에 이어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에까지 이른 근래의 조기퇴진과 취업불황의 분위기 속에서 그만한 고령의 인사들이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구조조정의 칼바람도 고수(?)들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고 빗겨갔던가 하는 탄성과 아울러 역시 금융권인가 싶기도 하다.

물론 나이만으로 진퇴를 결정지어야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나이 든 게 죄냐’하는 볼 멘 소리가 나옴직하고 경험의 사회적 유용성이 너무 무시되는 게 아니냐는 불만도 나올 법하다. 실상 우리 사회가 경륜과 경험의 유용성에 대해 너무 소홀히 여기는 듯한 일면은 있다.

그렇긴 해도 세상에선 적절히 물러나야 하는 시기가 분명 있을 듯하다. 예로부터 동양사회에선 나이 70에 이르면 세상사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 후진을 돌보는, 그야말로 원로의 자리로 물러나 앉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동양의 고전이자 초등교육 교재였던 소학(小學)에서도 그렇게 일렀다. 노인 공경이 극진했던 조선조에서도 조정대신들이 나이 70에 이르면 궤장( 杖)을 내리고 일선에서 물러나 앉도록 했다.

그렇다고 그 시절에 일선에서 물러난 이들이 하릴없이 시간만 죽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경륜과 경험은 고향으로 물러나 후진들을 돌봄으로써 자연스럽게 사회 속에 전수돼 갔다. 단지 젊은 세대와 경쟁적 관계에서 한발 빗겨서 그들의 나아감을 거들어 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놓지 않으면서도 후대의 길을 가로막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령자들의 문제는 자신의 경험이 대접받지 못한다는 소외감 내지 상실감을 품은 다수와 물러날 시점을 인정하지 않고 노욕에 사로잡힌 소수, 그 양쪽에서 두루 발견된다. 분명 노인들의 경험과 경륜은 활용여부에 따라 가치가 크게 달라지는 사회적 자산이다. 사회도 제도적으로 그런 자산을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권력을 가진 소수가 노욕에 사로잡혀 젊은 세대와 경쟁하며 그들이 지닌 권력으로 젊은 세대가 이끌어 나아가야 할 변화, 개혁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노년에 지니게 된 경륜을 지혜로 나눠줄 때에는 너무 깊이 간섭하거나 대가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야말로 후대에 선물로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덕을 보일 때 사회는 진심으로 그런 노인들을 ‘원로’로 대접할 것이다. 흔히들 우리 사회에 원로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투덜대긴 하지만 곁에 있는 원로를 볼 줄 아는 ‘눈’도 없다. 원로다운 덕있는 노인들도 드물다.

덕은 향기로운 권위가 되고 노욕은 악취나는 권력이 된다. 물리력에 의존한 권위는 권력의 또다른 얼굴일 뿐이다.

천지가 변하는 속성을 지녔는데 그 가운데서 사회가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 스스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노련한 경륜의 뒷받침없이 변화를 수용하다보면 또다른 형태의 무수한 상처를 입게 된다.

지금은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대다. 그만큼 급격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의 발걸음이 빨라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뒤를 받쳐줄 든든한 선대의 경륜이 없이는 불안한 걸음일 수밖에 없다. 선대의 경륜을 어떻게 무리없이 전수받느냐에 그 사회의 성공적 발전 여부가 달려있다. 그러나 젊은 세대와 경쟁하는 노익장들로는 오히려 장애가 될 뿐이다.

정치권이 급격한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고 표리관계에 있는 경제계 역시 그만한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계획경제에 길들여졌던 한국의 경제구조, 그 정책적 연결고리인 금융산업은 아직도 겪어야 할 진통의 시간이 더 남아있다. 경륜을 개인의 권력유지 수단이 아닌 사회적 지혜로 전수할 진정한 노익장들이 그만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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