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성장', '韓 영화 침체'에 시장 구조 변화
'객단가 하락', '정부 지원 축소'에 전망 어두워
[서울파이낸스 여용준 기자]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되면 극장에서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이제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스노우캣의 웹툰 '옹동스'에 등장하는 대사("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를 패러디한 문장이다. 2014년에 처음 등장한 이 대사는 현재까지도 인터넷 밈(meme)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인터넷 밈을 패러디해 이 기사의 첫 문장을 시작한 이유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은 3일 기자회견을 열고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폐막작과 공식 상영작을 공개했다. 올해 개막작은 넷플릭스에서 투자·배급하는 영화 '전, 란'이다.
박도신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은 3일 기자간담회에서 '전, 란'에 대해 "상당히 대중적인 영화라고 판단했다. 역대 개막작 중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라며 "넷플릭스라는 이유 때문에 고민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전, 란'은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김신록 등이 출연하고 '심야의 FM'을 연출한 김상만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박찬욱 감독과 신철 대표가 제작을 맡았으며 박찬욱 감독의 회사인 모호필름과 세미콜론 스튜디오가 제작사로 참여한다. 세미콜론 스튜디오는 최근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에 공동제작사로 참여했다.
올해 개막작 '전, 란'이 주목받는 이유는 이 영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이기 때문이다. 역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OTT 오리지널 영화가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의 경우 저예산 독립영화라도 뛰어난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면 개막작으로 선정해왔다. 실제 지난해 개막작이었던 장건재 감독의 '한국이 싫어서'는 총 제작비 4억원이 투입된 초저예산 영화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온 스크린 섹션 신설 이후 OTT 오리지널 영화도 소개해왔다. 그러나 개막작으로 OTT 영화가 선정된 것은 영화의 중심이 극장에서 OTT로 이동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최근 한국영화계에서는 영화제작 편수가 축소됐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개봉하지 못한, 이른바 '창고영화'들이 대부분 개봉했고 이들 모두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여기에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지원 축소로 영화계 전반이 침체된 상황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달 발간한 '2024년 7월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7월 한국영화 매출은 53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18억원 늘었다. 관객수 역시 562만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30만명 증가했다. 지난해 '밀수' 외에 한국영화 개봉작이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올해 7월에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탈주', '파일럿', '핸섬가이즈' 등이 개봉하면서 한국영화 상승세를 이끌었다.
그러나 객단가는 9500원대로 그리 높지 않은 상황이다. 객단가는 관객 1명이 실제 지출하는 돈으로 극장과 영화배급사가 갖는 실질적인 수익의 지표가 된다. 극장 객단가는 지난해 1만원대 이상이었으나 올해 9000원대로 떨어졌다. 이는 프로모션 티켓과 쿠폰 등 마케팅 비용이 그만큼 많이 들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1100만명 관객이 든 영화 '파묘'는 흥행에도 불구하고 객단가 하락으로 100억원 이상을 손해봤다. 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는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중 열린 '한국영화 생태계 복원을 위한 토론회'에서 "'파묘' 객단가가 9655원밖에 안 되고 이때 제작사에 돌아오는 돈은 3797원"이라며 "객단가가 1만2000원일 때와 비교하면 티켓 1장당 900원이 사라진 것이다. '파묘' 제작사는 가만히 앉아 105억원을 손해 본 것"이라고 말했다.
객단가 하락에 대해 영화계에서는 멀티플렉스의 과도한 티켓값 인상과 이로 인한 관객수 감소를 만회하기 위한 프로모션 등 영향이라고 보고 있다. 영화 수익은 극장과 배급사가 5:5로 나눠갖도록 하고 있지만, 극장 측의 과도한 프로모션으로 배급사가 가져가는 수익이 40%에도 못미친다는 게 영화계 주장이다.
이 가운데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독립영화 제작지원 규모도 축소됐다. 영화산업 위기극복 영화인연대는 "영화제들은 지원 예산이 큰 폭으로 삭감되고 지원 영화제의 숫자까지 10개로 제한됐다"며 "독립·예술영화 창작과 유통을 위한 예산과 영화기획 및 제작을 위한 지원금도 매우 축소됐으며 애니메이션 예산과 지역 예산처럼 아예 전액 삭감된 항목도 부지기수"라고 전했다.
여기에 한국영화 시장은 '천만영화 아니면 백만영화'로 양극화되면서 텐트폴 영화가 아니면 투자를 받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천만영화인 '파묘', '범죄도시4'를 제외하면 200만 관객을 넘긴 영화는 '탈주'와 '파일럿'이 유일하다.
이처럼 극장 영화에 대한 회의론이 커진데다 독립영화 제작지원 규모도 축소되면서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OTT 영화가 선정되는 일이 발생했다. 어쩌면 별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30년 역사를 향해가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이례적인 변화가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긴 하다.
그리고, 역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 극장에서 모조리 망했다는 오랜 전설은, 이제 아무 의미없는 이야기가 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