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공 세상
유리공 세상
  • 서울금융신문사
  • 승인 2003.10.2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코카콜라의 CEO는 직원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삶을 공중에서 5개의 공을 돌리는 것이라고 상상해 보자. 각각의 공은 일, 가족, 건강, 친구, 그리고 영혼(자아)이다. 얼마 되지 않아 일이라는 공은 고무공이어서 떨어뜨리더라도 바로 튀어 오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4개의 공들은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해석컨대 일은 한 번 잃어도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지만 가족, 건강, 친구, 자아는 그렇지 않다는 말인 듯 싶다. 그만큼 회사 일 못지 않게 가족, 건강, 친구, 자아에 신경을 쓰라는 독려일 터다.

한 회사의 CEO가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부러움의 감정이 생겼고, 선진국이 되면 결국 이런 회사 문화가 정착되겠구나 깨닫게 됐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와는 소원한 얘기인 듯도 싶다.

어쩌면 한국의 은행원들, 아니 한국의 가장들은 다섯 개의 유리공을 돌리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은행권에 다시 명예퇴직 바람이 불었다. 외환은행에 이어 우리은행이 지난 15일까지 신청자를 접수했다. 300명을 목표로 했지만 실제 신청한 사람은 60여명 안팎이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들은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샜으리라. 옆에 누워 있는 아내가 눈에 밟혔을 테고, 천진난만하게 단꿈에 빠져 있는 아이들도 그랬을 테다. 직장이란 공을 떨어뜨렸을 때 과연 다시 튀어 오를 수 있을까.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건 아닐까.

퇴직만큼이나 재취업이 활성화돼 있는 미국 사회에서는 ‘일’이 고무공일지 몰라도 우리 사회에선 그렇지 못하다. 우리 가장들은 이 공을 애지중지하며 다른 공들은 별로 거들떠 보지 않았다. 가족, 건강, 친구가 고무공이라 철썩 같이 믿으면서.

우리 사회는 어느덧 완벽한 인간형을 요구하고 있다. 일에서는 톱(top), 가족에게는 자상한 아빠와 남편(혹은 엄마와 아내), 레저와 건강을 챙길 줄 아는 ‘쿨’한 라이프 스타일. 그렇지 못하면 어딘가 모자란 듯 여긴다.

지난 2000년, 해고당한 한 은행원이 자신이 근무한 은행을 상대로 해고무효확인 청구소송을 내 승소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소송하고 싶은 이들이 어디 이 사람뿐이었을까.

소송이 무서워서였을까 만은 우리은행은 목표치보다 턱없이(?) 모자란 이번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한다.

고무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골프공 정도의 내성을 가진 세상이 하루 빨리 열렸으면 싶다.




이 시간 주요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