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종의 세상보기] 피카소와 언론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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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전시회를 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 도착한 시간은 휴일 점심 시간 무렵. 한시간 넘게 대기하다 110여점의 작품을 둘러본다.

이달 29일까지 전시하는, 국내에선 흔치 않은 기회인데 코로나19 때에 해외로도 못가는 상황에 누릴 수 있는 작은 호사다. 문외한이지만 그가 그린 그림이 독특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림 속 인물의 눈은 매우 인상적이다. 얼굴의 형체도 이상 야릇하지만 눈이 제 위치에 있지 않다보니 오히려 그 눈이 구도의 중심이 된다.

콧구멍은 왜이리 작은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것도 모델은 공식적으로 7명의 그의 연인이었다 하니 연인들은 이상하게 그린 그의 그림을 양해해 줬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찌됐든 그의 작품의 큰 모티브는 그의 연인이었고 그는 실제 사랑이 자신의 작업 원동력임을 밝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 ‘잠자는 여인’이 느낌다운 느낌을 주었지만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대작 ‘한국에서의 학살’도 인상적이었다. 나체의 여인, 임산부, 아이를 부둥켜안고 공포에 질린 한 남성, 아무것도 모르고 땅을 보며 놀고 있는 아이 등을 향해 총을 겨누는 이들. 군인마저 기이하다. 사람이 아닌 로봇처럼 그려 명령에 그저 따르는 비인간성을 표현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총구는 세 가닥으로 나눠져 있어 더 눈길을 끌면서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피카소는 공산당원이라 한다. 이에 한국에서의 학살 그림 속 군인들은 미군으로 보통 해석된다. 그 자신이 이 그림에 대해 어떠한 해석도 내놓은 적이 없지만 그렇게 이해되는 게 대부분이다. 당시 미국에서도 피카소 작품이 전시되고 있어 이 그림에 미국 측은 무척이나 당황해 했다 한다.

우리도 군부 정권 시절 이 그림이 한국에 들어와 전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피카소야 전쟁의 잔학성을 고발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겠지만 남이든 북이든 이 그림의 배경 지식을 모르는 일반 시민들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을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 외 전시에서는 도자기들도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도예 틀을 깬 것이지만 그는 도자기를 그림을 그리는 바탕으로 생각한 냥 보였다. 올빼미는 문양에 왜 그리 자주 등장하는지. 이어폰을 꼽고 앱을 깔아 작품마다 설명을 들어보았을 걸 했지만 피카소의 진품 앞에 마주 선 것만도 큰 기회라 생각하자.

피카소가 지금도 추앙받는 것은 그의 작품이 기존 기법을 깬 ‘혁신’에 있었으리라. ‘아비뇽의 처녀들’은 친구들이 창피를 당할 것이라며 전시를 말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림은 그의 현재를 있게 할 정도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그림 소재도 기존과 달리 사창가 여인을 대상으로 했다.

피카소 그림의 끝은 자유를 향해 무한대로 달리는 느낌이었고 때론 아이 같다는 인상도 짙었다.

그 표현의 자유가 전시되는 끝자락에 우리에겐 언론중재법 개정안 같은 언론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도 있다. 완벽한 팩트와 완벽한 진리를 가장해 자연스런 트림조차 못내게 막으려는 시도는 무엇 때문인가. 또 혁신을 지체하게 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막바지에 다다른 피카소 전시회를 보며 이생각 저생각 해본다. 여름과 가을이 뒤섞인 시간. 정책 없는 주장과 공격이 난무한 대선 주자들에 대한 검증은 누가 할 것인가. 시민피해의 실질적 구제는 높이면서 권력과 자본이 이 법안을 악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피카소의 작품을 보았더니 생각이 너무 앞서갔나.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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